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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장준하의 4.19와 5.16 (2) - 그 날, 1960년 4월 19일<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6.03.10 15:07
4·19혁명 당시

그 날, 함석헌과 장준하는 함께 있었다. 장준하에게 그것은 예감이었다. 오후 두서너 시 쯤 되면 광화문이며 종로통에 인산(人山)이 쌓이고, 인천(人川)이 흐를 것이라는.

장준하에게 그것은 예감이었다. 그 인산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덮고, 그 인천은 그 정권을 깨끗이, 아주 깨끗이 쓸어 가버릴 것이라는.

장준하는 함석헌에게 약간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때가 오전 11시쯤이었다. 함석헌이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뭘 하셔요?”
“응, 그저…”
“아니 선생님, 오늘 같은 날 집에 계십니까? 곧 엄청난 일이 벌어질텐데요. 지금 사(社)로 곧 나오시지요. 오후에는 선생님 시간을 저와 함께 하셨으면 합니다”
“그럽시다. 그럼 지금 곧 가리다”

장준하의 전화를 끝내자 마자 함석헌은 바로 집을 나섰다. 하루 한 끼만 먹는 함석헌은 그 한끼를 오후 2시에서 2시 30분 사이에 한다. 장준하도 함석헌의 일일 일식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함석헌은 감식(甘食)에 대식가였다. 장준하의 채근에 함석헌은 조금은 일찍이 점심을 하고 종로의 화신(和信) 건너편 한청(韓靑)빌딩 3층에 자리잡은 「사상계」사(社)의 종로통편의 유리창문을 모두 열어 재쳤다. 

한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사상계」사의 전화통들이 울려대기 시작한다. 장준하는 함석헌을 보고 조용한 웃음을 보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은 지난 수 년 동안의 독재정치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그 기폭제는 4월 11일, 당시 마산상고 1년 김주열군의 바다에 버려졌던 시체가 발견되면서였다. 어제는 4000 여명의 고려대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장준하는 여기저기 정보라인들을 총하여 오늘은 서울시내의 전 대학이 시위에 참가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2시가 되면서 광화문·종로통이 사람으로 미어지기 시작했다.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전 대학생들의 시위라는 보고였는데, 대학생들만이 아니었다. 교복을 단정히 여민 중고등학생들이 나타나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서 일반시민들이 눈에 띄게 합류했다. 함석헌과 장준하는 말이 없었다. 서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형언할 수 없는 감격에 가슴이 굳었다. 

“선생님”
“…”
“그런데도 아직 청와대에서는 화(禍)를 더욱 부르고 있습니다. 배후에 공산당이 개입한 흔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무슨일이 있어도 정권은 못 내주겠다는 거지요”
“…”
함석헌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탕…” 총성이 들렸다. 
“탕, 탕…” 총성이 다시 들렸다. 
“탕, 탕, 탕…” 총성이 연달았다. 광화문 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총소리였다. 함석헌과 장준하는 그 소리를 함께 들었다. 수십만 시민들 학생들이 경무대를 향하고 있다는 보고에 다급해진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적수공권의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한 것이다. 이 날, 이 한날, 1960년 4월 19일, 183명의 학생과 시민이 민주구현(民主具現)의 제물로 드려져 갔고 6200명이 총경상을 입는 비극이 연출되었다. 

이 날, 함석헌과 장준하는 거기, 종로의 화신 건너 한청빌딩 3층 「사상계사」에 함께 있었다. 「나남」 출판사에서 출판한 「장준하의 생애와 사상 민족혼·민주혼·자주혼」 177쪽엔 그 화신 앞 한청빌딩 「사상계」사(社)에서 4.19 데모학생들의 인파를 내려다보면서 감격해 마지않던 두 사람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 (「사상계」사 주최전국순회문화강연회·필자 주) 다음해, 우리는 4.19의 엄청난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장준하 선생과 함석헌 옹과는 세대적 차이가 있음에도 어려울 때는(시대적·역사적인, 필자 주) 늘 찾아오셔서 상의하곤 하셨다. 두 분은 동지적 관계를 지니고 계신 것 같았다. 19일, 두 분이 학생들과 시민들을 「사상계」사(社)에서 지켜보시던 모습은 묵묵히 역사의 격류를 속으로 되새기고 있는 것 같았다.(이문휘·李文輝·1958년 입사, 1961년 취재부장).”

함석헌은 4.19혁명과 「사상계」를 특별한 관계로 이해한다. 그는 후에 그가 쓴 글 “4.19와 5.16”중의 소제(小題) ‘4.19의 유래’에서 과언(過言)이라 하리만큼 4.19의 연원으로서 「사상계」를 격찬하고 있다. 우선은 4.19 학생혁명의 연원으로 해방직후의 학생운동을, 해방직후의 학생운동의 연원으로서 3.1운동을 들어, 3.1혁명에서의 학생운동·해방직후의 학생운동·4.19학생혁명의 틀을 그리는데, 4.19 학생혁명의 경우 또 다른 연원으로 「사상계」를 강증(强證)한다. 

4.19혁명 당시 대학생들의 운동 모습

필자가 ‘4.19혁명의 연원’으로서 함석헌이 말하는 4.19론(論)이 “과언이라 하리만큼”이라고 표현한 것은 함석헌의 그 논(論)이 마치 예찬에 가깝다고 보여 지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4.19의 연원으로서의 역할이 위의 둘보다도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단언한다. 4.19의 연원으로서 함석헌의 「사상계」론은 이렇다. 

“4.19 학생혁명의 유래로서 해방직후 전개되었던 그 학생운동은 한 마디로 기성정치인,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이요, 경고요, 호소였다는 것이다. 해방의 소식이 전해지자 감격과 환호가 강산을 뒤흔들었다. 물려들어갔던 죽음의 턱 아리가 너무 깊었고, 스스로 지은 죄가 너무 커 도저히 살아나갈 용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감히 살겠다 할 염치조차 없는 줄을 잘 알고 있던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해방이 온 것이다. 그것은 실로 큰 역사적 사면(赦免)이요, 민족적 회심을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정부수립 문제가 나오자 그 감격과 환희가 순식간에 부셔져 버렸다. 사생결단의 파쟁이 온 나라를 뒤흔들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이미 나라가 아니었다. 정치는 완전히 실종되어버렸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런 현상을 좌시하지 않았다. 역사가 시대가 학생들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불의와 부정으로 얼룩진 기성세대에의 저항, 새역사를 절규하는 의기…”  

4.19 학생세력은 바로 이 같은 해방직후 학생운동의 기운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함석헌은 말하고 있다. 이어서 함석헌은 “4.19 학생들에게 영향을 준 그 해방직후의 학생운동은 3.1운동사에 궐기했던 그 학생들의 궐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3.1운동은 그 태동도 그 후 운동의 중심세력이 된 것도 학생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당연한 것이다. 오늘의 학생과 그 저항운동을 생각할 때도 그 정신이 3.1에서 나온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씨알의 소리 1977.4·5 합병호 p.17)

그러나 함석헌이 4.19의 유래로 특별히 중시하는 것은 <사상계운동>(思想界運動)이었다. 4.19 학생운동의 원동력으로서 「사상계」에 대한 함석헌의 시각은 정말 각별했다. 

“그러나 위의 둘(해방직후의 학생운동과 3.1운동에서의 학생궐기·필자 주)보다도 더 큰 영향을 4.19에 끼친 것은 「사상계」지(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위의 둘은 역사를 통해 주어진 것이지만 「사상계」는 받아가진 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깨우쳐주고 부족한 것을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깨우쳐주고, 부족한 것을 깨우쳐 배워 얻을 수 있게 하는 정신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이 근본이요, 근본이기 때문에 귀중한 것이지만 역사에서는 오히려 사실의 의미(意味)를 깨달아서만 사실이된다. 자연적으로 반응하여 이루어진 사실보다도 그 사실을 자료로 삼아 분석하고 비판하여 다시 구성한 정신적사실(精神的事實)이야말로 다음의 역사를 낳는 원동력이 된다. 거기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사상계」가 우리 민주주의 발전사에 어떻게 큰 역할을 했느냐 하는 것은 오늘의 형편(유신이후의 언론통재·필자 주)과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3.1운동의 기억도, 해방직후의 기억도 다 잊지 않고 가지고 있는데, 오늘도 그 지나간 때와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시원한 운동이 없느냐? 두말할 것 없이 6.25이후에 「사상계」지(誌)가 했던 사명을 수행했던 기관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만은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상계」가 그 일을 했던 것은 그것을 누가 창립경영하고 누구누구가 글을 썼다는 것보다도 그 시기와 그 이루어진 활동방식에 있 할 것이다. 「사상계」가 시작된 것이 6.25전쟁 중 부산 한구석에 몰려있던 1953년 이었다. 이것을 전쟁 중에 공비의 출몰이 극심해 아주 위험했던 그리고 6.25를 체험하고 난후 그 민족적 환난 가운데서도 특별히 지도하는 지도자나 어떤 조직도 없이 국민사상의 방향이 아주 분명히 민주주의노선(民主主義路線)으로 결정되었다는 두 사실과 겸하여 생각해볼 때 자연히 거기 알려지는 것이 있는 것을 알 것이다.

장준하(張俊河)는 제때에 나와야 할 소리를 시작했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장준하가 한 것이 아니요, 시대자체, 씨알자체가 한 것이다. (전집17. p114-,“4.19의 유래”)

함석헌의 장준하, 「사상계」예찬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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