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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종교, '힘' (4)<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6.06.14 15:28

박정희, 이미 힘이 종교였던 그에겐 조국이니 민족이니 따위가, 더군다나 양심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이 존재할 수 없었다. 「힘」에 대한 그의 지극한 종교심은 필자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의 타고난 것이었다. 힘으로서의 종교, 종교로서의 힘에 대한 언급은 이후에도 더 계속될 것이다. 그의 이 「힘」이라는 천하에 잘못된 종교는 그가 거쳐 가는 한국의 현대사에 뭐라 형용 할 수 없는 병상(病像)을 남겼다. 어쩌면 그 병상은 제거할 수 없는 것일는지도 모를…….

그는 「힘」의 종교인으로서 가히 은총을 입은 사람이었다. 가는 곳마다 그 가슴속의 힘을 고조시켜주는 선진(先進)들이 있었다. 「대구사범」과 「만주군관학교」에서의 전형적인 일본형 무관 아리카와(有川), 「일본사관학교」에서의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 황국의 사관으로 최초의 부임지에서의 중국출신으로써 일황에의 충성을 대역설(大力說)하는 이들 말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박정희로 하여금 힘이 신임을 의심 없이 믿게 해준 사람들이었다. 아리카와와 나구모 쥬이치와의 관계는 이미 언급한 바이고, 이제 우리는 박정희와 당제영과의 관계를 새롭게 만나게 된다.

당제영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일본의 「북지나파견군」의 열하보병 제 8단장으로 박정희를 그의 작전 부관으로 거느렸던 자다. 일본군 상교(上校, 대령), 어떤 박정희 전기가들이나 편저자들도 이 제8단장 당제영과 박정희의 유다른 관계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힘의 신자 박정희가 이 일본출신이 아닌 중국출신 일본군 지휘관으로부터 조선인인 자신이 일황의 군장교로서 지닐 수밖에 없는 일말의 양심(?)같은 것을 지워버리는데 더할 수 없는 도움을 받았으리란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루는 8단장 당제영이 작전부관 박정희를 불렀다. 

“박부관, 그대는 어떻게 조선인으로 일본군 사관이 되었는가?”
박정희는 단장의 이외의 (?) 질문에도 대답은 없이 빙긋이 웃기만 했다. 빙긋이 웃는 박정희를 보면서 당제영 또한 그랬다. 처음부터 대답을 들으려 한 질문이 아니었으니…….
박정희는 단장 앞을 물러나오며 이렇게 말했다. 
“웬 쌩뚱 맞은 놈 같으니…….” 물론 속말이었다. 힘의 신을 받드는데 있어 대장보다 한수 더함이었다. 

열하성 제8단의 대일항쟁군토벌 작전 

박정희가 일선에 섰던 것은 아니라 해도 박정희는 대일항쟁군(對日抗爭軍) 토벌 작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필자가 박정희 참여했던 대(對)토벌작전을 대광복군(對光復軍)이 아닌 대일 항쟁군이라 표기한 것은 당시 당제영의 제8단이 관장한 작전지역의 성격 때문이다. 박정희를 작전(作戰) 부관으로 거느린 당제영의 제8단의 전선의 항일 세력은 갖가지 세력으로 그칠 줄을 몰랐다. 

“국민당정부의 국부 군관 군벌군, 독자적인 유격군, 심지어는 만주일대의 비적들까지 주역은 물론 중국인들이었지만 조선인 항일조직 또한 만만치 않았다. 조선인들은 임시정부 광복군, 연안의 조선의용군, 혹은 독립된 게릴라 부대로서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국부군이나 중공군과 함께 항일 유격전을 벌렸다. 조직의 구성과 이념은 달랐지만 당시 조선인 항일 부대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 일본에 대한 무력항쟁과 조국의 광복이었다. 

박정희(朴正熙)가 일본군장교로서 토벌한 항일세력이란 이런 세력들이었다. 식민지민족의 비극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속해있던 일본군이 「소탕의 대상」으로 삼았던 항일세력 속에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이역에서 피 흘린 동족의 청년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으로 끌려간 조선인 학병이나 징용군 가운데서는 일군으로부터 탈주하여 항일군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박정희의 실정백서」 30쪽, 2000.12.5.,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

더군다나 박정희를 작전부관으로 하는 이 당제영의 제8단의 작전지역을 주목(注目)할 필요가 있다. 이 지역이 곧 <만주와 중국대륙을 잇는 군사요충지>라는 사실에서 말이다. 해서, 이 지역이야 말로 ‘모든 항일세력의 숨길’이 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당제영의 작전부관으로 바로 이곳을 길목으로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만주와 대륙을 이어내는 항일세력의 토벌을 위해서였다! 물론 박정희가 이곳(동부지구성과 화북일대)의 작전지역으로서 그 중요성을 간파, 자청 자진하여 ‘전입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는 그의 신(神)인 「힘」에 의해 제 동족을 학살, 토벌하는 길목의 첨병이 되어 있었다. 그가 광복군 토벌 범이었다는 기록들은 이 같은 사연으로 해서 전해진 것이다. 

박정희를 정죄 받을 자로 이끌어가는 역사의 전략은 실로 오묘했다 할 것이다. 조갑제의 「박정희의 결정적인 순간들」은 이런 전언을 준다. 

방원철이 선임 장교로 있던 만리장성 남쪽에서 작전을 마치고 반벽산에서 20리 쯤 떨어진 고산자(古山子)의 본부로 돌아온 것인 8월 13일 오후, 목욕을 하려는데, 박정희 중위가 전화를 걸어왔다. 긴장된 목소리였다. 
“형님 (방원철 만주군관학교 1기 출신으로 박정희의 1년 선배였음. 저자 주), 고생하셨습니다. 지금부터 비밀유지를 위해 조선어를 쓰겠습니다. 지난 9일 소련이 침공하여 전면전에 돌입하였습니다. 우리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서 <싱룽>에 집결했다가 <뚜어룬>으로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내일 새벽 5시까지 반벽산에 도착해 주십시오. 반벽산에서 부대를 정비하여 싱룽으로 향합니다. 장비를 최대한 가볍게 꾸려주십시오.” 
박정희는 7월 1일부로 중위로 진급했고, 이제는 자타가 공인하는 작전장교 였다. 지시는 아니었다 해도 예하 부대를 향한 그의 전달에 의해 항일군들의 생사가 결정되고 있었다. 그야말로 토벌이 말이다. 

역사의 벌(罰)

역사는 절대의 지향점(Omega Point)을 갖는다. 절대의 지향점? 그렇다. 절대의 지향점이다. 대체적으로 통치자(?)라는 것들이 이 역사적 사실에 무지하거나, 안다. 알았다 해도 아예 무시해 버리는 어리석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 역사의 절대 지향점이 <공존> (co-existence) 라는 것이다. 공론의 공(公)이 란 전(全)을 뜻한다. “공의(公儀)라 공평(公平)이라 하지만 전체(全體)를 위한 것이 공의요, 전체의 자리에서 분배한 것이 공평이다. 공의 반대는 사(私)인데 사란 나다. 부분이다. 부분이 아무리 커도 부분인 이상 공은 못된다. 이런 의미에서 다수가결이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란 말은 논리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를 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전체가 하나로 있으면 깨끗한 (聖, 거룩) 것, 전체에서 떨어져 있으면 버려진 것이다. Whole이 Holy다. 오월동주(吳越同舟)라, ‘지는 놈이 이기는 놈’이라 하는 말이 다 그 증언이다. 힘이란 너와 나를 나눈다. 힘이란 힘 그것을 가진 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더 강대해 지도록 유혹한다. 힘없는 자를 없어져야 할 자로 몰아간다. 

박정희의 신(神)은 바로 그 힘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더 할 수 없는 불행스러운 일이었지만 「힘」에 미쳐버린 그로서는 힘을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하늘의 벌(天罰)을 부르는 행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역사로부터 회심의 기회가 주어진다. 

일본군국주의의 패망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박정희가 죄의 신(神一力)에서 깨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그는 그의 죄신(罪神)에게서 벗어날 줄을 몰랐다. 그가 역사로부터 퇴장령을 받게 되는 1979년 10월 26일은 이미 이때, 예정된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박정희 개인만의 불행은 아니었다. 그것은 실로 한국현대사의 불행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불행 속에서도 역으로 박정희는 한 큰 메시지를 남기고 갔다. “어떤 힘에도 역사는 제 길을 향보하지 않는다”는. 

항일 세력을 섬멸하기 위해 그 길목을 지키기 정확히 1년 1개월, 혹자는 박정희가 수개월 전부터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 같은 예견이 있었나, 없었나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문제는 아직도 힘을 신으로 믿는 그 거짓 신에게서 깨어날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짓신의 실체는 일본이라는…….

그런데 그 일본이 망한 것이다. 박정희로서는 도저히 힘의 유일한 실체인 일본이 망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지만, 그러나 힘의 실체(?)인 그 일본이 망했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니…….
상황은 정말 우습게 반전되어 갔다. 박정희는 어제까지 함께 일본사관이라며 생사를 함께 해온 중국출신 지휘관들에 의해서 무장해제를 당하게 된다. (이때 신현준, 방원철, 이주일 등 제 8단에 함께 있던 조선인 장교들과 함께 해제 당함. 필자 주) 박정희를 포함한 조선인 장교 일단은 그들의 본진인 8단을 떠나야 했다.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찾아야 했다. 우선 북경을 향했다. 북경에 도착한 8월 29일, 이들은 어렵잖게 조선인 동포가 경영한다는 덕경루(德慶樓)를 찾았다. 생각보다 큰 대형식당으로, 거기엔 이미 학병으로 끌려갔던 젊은이들, 만주 일대를 배회하던 청장년들, 일군을 무장해제를 당하고 모여든 자신들과 같은 이들이 떼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북경동북쪽에 위치한 북신구(北新邱)로 옮겨졌고 거기 숙영지가 이루어졌다. 400여명이나 되는 무리였다. 이곳 숙영지를 마련해 준 것이 최용덕 중국공군소장으로  사령관 장개석의 전용기를 조종했던 경륜을 지닌 자였다. 기이한 것은 이 최용덕이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진짜 광복군 장준하(張俊河)가 주동이 되어 개설된 「토교부대」장으로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장준하와 박정희가 실제로 대면할 뻔 했던 것이다. 최용덕은 이들 떠돌이들 400여명을 김학규(金學奎)가 지휘하는 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시켰다.

이것이 박정희가 정말 어이없게도 <광복군 박정희>로 불려 지게 된 이유다. 박정희, 신현준, 이주일은 이 광복군 제3지대 1대대로 명명하게 되는데, 신현준은 대대장, 이주일은 1중대장, 박정희는 2중대장으로 발령된다. 그러나 박정희 일단의 발령은 실로 부끄러운 것이었다. 세계군단사(世界軍團史)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판의 군조(軍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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