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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종교 「힘」 (5)<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6.07.05 15:12

광복군 제3지대 제2중대장 박정희!

그랬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알려진 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제3지대 제2중대장이었다. 정확하게 한달 전 까지도 그는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항일군전선의 교란, 더 나아가 그 소탕을 위한 일군작전장교로서 분골쇄신하던 자였지만 말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박정희는 그때에도 일황의 이름으로 일본군부가 그 허리에 채워준 소위 그 닢본도(日本刀)를 그대로 차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 박정희! 박정희는 그런 인간(?) 이었다.

망했던 조국이 다시 일어났는데 기쁨은커녕 오히려 그지없이 불편한 사람. 치욕의 압박을 들치고 일어나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는데도 씁쓸해 하다못해 울화가 치미는 사람, 그것이 박정희 였다. 

저주였다. 재앙이었다. 사람이 사람 노릇은커녕, 오히려 사람 노릇하는 주변이 혐오스러워지는 사람, 그것을 저주당한 것, 재앙당한 것이란 말 말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박정희의 비극은 1961년 5.16에 와서 빚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에 오기를 비극을 연출해야하는 명(命)을 받고 온 것이다. 

1946년 5월, 미군이 제공한 LST를 타고 조선을 향하는 박정희는 계급장을 뗀 아주 초라한 야전복 차림에 “다소 길어 보이는 군도(軍刀)”를 차고 있었다.  비록 그의 자랑이었던 일본은 무너졌다 해도, 그래서 이제는 그 일본의 것으로서의 박정희는 아니라 해도, 이제까지 일구월심 (日久月深) 그가 신(神)으로 섬겨온 ‘힘’을 버릴 수는, 그 힘으로부터 떠날 수는 없었다. 그가 찬 옆구리의 긴 칼!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거짓 신이었음에도 이미 힘에 미쳐버린 박정희는 그 거짓 신, 그 악신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비극이었다!

생각해보라! 제 나라를 말아먹은 원수나라의 군 작전사관이 되어 의기양양해 하던 사람(?), 빼앗긴 땅, 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자며 부모도 처자식도 뒤에 둔 채, 생명을 홍모(鴻毛)처럼 여기며 이국의 전선을 내달리는 제 조국의 그 고귀한 항일 전사들을 토벌하는 것으로 업을 삼은 사람! 사람은 여기까지 타락할 수 있는 것. 박정희는 그 인간타락의 전형으로 도대체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 것인가를 명시하기 위해서 그는 귀태(鬼胎)가 아닌 귀태(貴胎, 꼭 와야 하는 사람, 필자 주)여야 했다.

자신이 망친나라에 조국을 다시 찾자며 험산, 광야, 폭우 폭양을 달리는 제 동족을 토벌하던 그 철권제국의 장검을 그대로 차고 돌아오는 너. 아, 박정희의 그 범죄사(犯罪史)의 닢본도는 어디에 있을까? 

일황군(日皇軍)의 사관에서 조선(朝鮮)의 사관으로

1946년 5월 6일, 박정희가 승선한 미군의 함정은 이틀 후 조선의 부산항에 도착한다. 그가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일본의 <헤이다이상>이 되기 위해 만주신경(현 장춘, 長春)군관학교를 찾은 지 6년만이었다. 박정희에게 있어 일본의 패전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신(神)의 실체로 믿었던 일본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 일본이 그렇게 쉬, 그렇게 어이없이 역사의 전면에서 퇴각해 버리다니…….박정희는 새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새길을 찾아보자하는 박정희에겐 자신마저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이상한 열기가 일기 시작한다. 그 열기는 박정희로 하여금 힘의 실체는 일본도 조선도 아닌 ‘나, 나여야 한다’는 결단에 이르게 한다. 운도 따르는듯했다. 

미 군정청은 오월 남조선국방경비대 (국군의 전신)를 창설한다. 그리고 5월 1일, 남한의 「국방경비사관학교」가 창립되는데, 여기 박정희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의 동기였던 이한림(李翰林)이 사관학교의 교관 겸 학생 대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박정희는 다시 한 번 기지개를 되는 양 폈다. 고향집을 박차고 서울 길에 올랐다. 이한림을 찾았다. 이한림은 오히려 제 「힘」을 만난 듯 반가워하며 군에의 복귀(?)를 강권했다. 박정희가 누군가? 대구사범출신에 만군사관학교 수석졸업생 아닌가? 이것뿐만 인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일본교육총감상의 수상자로 마쳤고, 일본육사교장으로부터는 뼛속까지 일본인 정신이 흐르고 있는 자라는 극찬을 받은 자 아닌가?

“이봐 박 중위, (박정희의 일본군사관으로서 마지막 계급, 엉터리 광복군으로서의 계급이 한결 같이 중위였다, 필자 주) 사관 입대는 조금도 걱정할 거 없어. 오히려 군부에서는 환영하고 있으니까...”

이한림의 강권에 박정희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9월 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육군사관학교 전신) 제 2기생으로 입교 한다. 황군장교로서나 조선군 장교로서나 군(軍) 생활은 그에게 맞춤 판이었다. 교사로서의 기억은 그에게 전혀 없었다. 그 만큼 군 생활이 그에게 안성맞춤 이었다는 것이다. 

9월에 입교, 12월에 졸업한 박정희는 다시 소위로 임관되어 춘천에 주둔한 제8연대에 배치되고, 9개월쯤의 근무 후 1947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으로 전출된다. 박정희의 적어도 군인으로서의 병영생활은 칭찬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헌신적이었다. 지저분했던 병영이 박정희와 그의 병사들을 통해 놀랄 만큼 산듯해져 갔다. 생도들은 박정희를 우러렀다. 

박정희는 남로당(南勞黨)원이었나?

1949년 2월 8일 (1963년 10월 13일자 동아일보 긴급 호외판에서는 2월 13일로 보도되고 있음. 필자 주), 군법 회의는 피고인 박정희에게 국방경비대법 제 18조, 33군 위반으로 사형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통위부 (미군정당시 국방부에 해당하는)의 장교식당에 임시로 마련된 군사법정에서 였다. 

재판장은 김완용 중령, 심판관 김대현 중령 등 3인, 검찰관, 국선변호인 등이 참석했다. 이 판결로 인해 박정희는 현직에서 파면되었고 급료 역시 몰수 되었다. 이 같은 ‘박정희의 사형구형에 무기선고’ 사실이 동아일보의 긴급 호외보도로 지축을 뒤흔들게 된 것은 1963년 10월에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전을 통해서였다.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선거 중 유권자들의 관심 뿐만 아니라 가장 휘발성이 강한 선거였다. 

4.19로 탄생한 민주당과 그 민주당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한 그 박정희의 군부세력과의 마찰이 아닌 정면대결이었으니 그 긴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다 단 시간에 혁명(?)의 목표를 완수하고 원대 복귀하겠다던 그 쿠데타의 수괴 박정희가 공화당을 창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박정희가 「골수 남로당」원으로 사형구형에 무기선고를 받은 자였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문제시하는 것은 그렇다면 ‘박정희는 실제로 남로당원이었나?’ 하는 것이다. 

군부 내 좌익세력을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숙청대상으로 문제시 하게 된 것은 1948년 10월 19일, 여순 반란사건(麗順反亂事件)을 접하고 부터였다. 주동자는 여수주둔 14연대의 남로당조직책인 지창수(池昌壽) 상사였다. 점호를 마치고 전부대원이 막 취침에 들려는 찰나였다. 

이미 군 내부의 남로당 세력은 일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지창수의 비상 나팔을 신호로 제주도의 공비 토벌 작전부대로 출동 대기중이었던 부대였다. 이날 밤 반란으로 20여명의 장교들을 사살, 여수를 완전 장악하게 된다. 여기에 순천주둔 2개 중대가 호응, 순천까지를 완전 점령하게 되는데, 이 반란에서 군인들과 공무원이 1200명, 400여명의 주민들이 사살되었다. 그런데 대통령 후보 박정희가 이 남로당의 진수당원으로 군부 내의 조직책이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이 군사재판의 선고로 적지 않은 고통과 시련을 당해야 했지만 그러나 사실 그는 남로당원은 아니었다. 

남로당원입당서에 그가 낙인 했던 것이 사실이고 당 노선의 명에 따라 동작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진성, 진짜 남로당원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가 골수남로당원들 마저도 당원으로 인정할 만큼 그 활동에 주도면밀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의 진면목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가 군내의 남로당의 조직구도를 구체적으로 군부에 제공했다는 주장은 사실이다. 그는 아주 정확한 남로당의 군 조직 명단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박정희의 신상(身上)을 알려할 때 이 부분을 주목 또 주목해야 한다. 유사시 남로당의 군이 동원 되어야 할 때의 그 조직을 주관하고 있는 박정희가 결코 남로당의 이데올로기를 쫓는 자가 아니었다는 것 말이다. 박정희를 남로당으로 포섭해 들인 것은 남로당 군 총책 이재복 이었는데, 그러나 이재복에게 박정희는 끝까지 동지는 아니었다. 박정희를 비교적 잘 알고 있던 주변의 군우들에게도 박정희는 당찬 군인으로서는 틀림이 없었지만 「사상」의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실록 군인 박정희」 정은현, 2004.10.18. 개마고원 참조) 그렇다면 박정희의 생각은 무엇일까? 

박정희의 생각은 오직하나, 「나, 박정희」 였다. 자신이 남로당원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남로당을 자기 것으로 소유, 활용하려는 것 아니었을까? 박정희의 눈에 군내부와 남로당의 조직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힘의 집단」이었다. 박정희가 전혀 남로당이 아니면서도 남로당의 조직을 꿰차고 있던 것은 그래서였다. 

사형구형에 무죄선고를 받았던 박정희가 2심(二審)에서 징역 10년으로의 감형, 그 감형된 형기까지를 집행정지로 풀려난 것은 결코 천운이 아니었다. 그는 결코 좌파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이 박정희의 2심을 확인한 ‘확인 장관’은 대한민국 육군 총참모장 이응준이었다. 박정희가 하늘로 섬겼던(?)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거친 대좌(대령)출신이었다. 박정희는 이제 모든 악몽을 벗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대한민국육군 장교로 승승장구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1950년 10월 25일 육군 9사단의 참모장으로 다음해 1951년 12월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차장으로,59년 7월 제6관구사령관, 1960년 제2 군부사령관을 거쳐 다음 해 1961년 5월 16일 저 익명의 「군사 쿠데타」를 감행한다. 천형(天刑)의 범죄(犯罪)였다.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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