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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권의 탄압에 저항하는 민중 혼(魂)<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6.07.15 13:43

함석헌(咸錫憲)과 장준하(張俊河)

함석헌(咸錫憲)은 역사·뜻·참을 하느님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역사의 배후, 우주의 배후에 존재하는 ‘절대의 의지’를 철석같이 믿었다. 제도권 학자들의 반론이 없지 않았지만 자신의 그 절대의지에 대한 믿음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칼든 놈, 돈 가진 놈, 권력가진 놈이 뭐라거나 이 역사의 배후, 우주의 배후에 존재하는 그 절대의지에 의해서 역사는 진화해가는 것이라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를 종교사상가, 역사적 종교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함석헌은 그 하느님, 곧 우주배후의 절대의지 진행, 진화에 그 절대적 ‘대행 주체’를 민중이라고 이해한다.   

“우주에서는 하나님의 전(全)이요, 역사에서는 사람(民衆)이 전(全)이다”(전집 2권 53쪽, 「人間革命의 哲學」) 우주의 주(主)이신 그 절대의지는 그의 역사적 과제를 사람에게 이임해 사람으로 이루어가게 한다는 것인데, 이 같은 종교적 사(史)관은 그를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순류(順流)와 역류(逆流)가 끊임없이 맞부딪히는 역사의 현장에서 몸부림치게 했다. 

“나를 곱다 밉다 말라. 글에 조리가 있느니 없느니 말라. 이 부조리를 깨치고, 이 짙은 어두움을 뚫으며 이 수수께끼를 풀 때까지 나는 미친 듯이 아우성을 치며 회오리바람을 돌지 않을 수 없느니라”(전집 4권 10쪽, 1964)

박정희의 군부반란세력이 「한국사 초유의 민주정권」을 전복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는가 하더니, 곧이어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그 명칭을 개정한다. 명실 공히 대권을 장악한 것이다. 박정희가 「힘」의 신에 포박되어 일로 매진 해 온 그 정상에 좌정(?)하는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가 알았거나 몰랐거나 그는 신이 되려하는 자였다. 박정희가 되고자 하는 신이란 저-구만창공을 넘어있는 어떤 종교(?)의 신이 아니라 적어도 내가 속한 집단의 절대권자를 의미한다. 그토록 신이 되기 위해 이를 갈던 그가 바로 그 신의 자리에 착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란 더 할 수 없이 묘한 것이다. 우주를 싸고돌며 이끌어가는 그 절대의지는 사람의 말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신묘한 것이다. 박정희로 하여금 “내가 천하다”하게한 그 절대의지는 또 그 박정희로 하여금 잠 못 이루게 하는 호적수를 불러세운다. 함석헌(咸錫憲)과 장준하(張俊河) 말이다.

함석헌·장준하 그리고 박정희는 ‘붓’과 ‘칼’의 싸움의 기이함을 온 민족으로 하여금 주목하게 했다. 특히 함석헌과 장준하는 칼로도 자를 수 없는, 군화발로도 짓이길 수 없는, 철갑차로도 밀어 버릴 수 없는 또 다른 비력(秘力)이 엄존한다는 사실을 진리로 밝혀준다. 그 비력이 곧 민중혼(民衆魂)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민중혼이었다. 「思想界」를 통해 박정희의 ‘칼’을 향해 우는 함석헌과 장준하의 그 붓의 울림은 그야말로 「민중혼」의 울부짖음이었다.

함석헌이 「思想界」에 쓴 글이 좌담회 7회를 합해 30회가 넘는데 특별히 그 글들 중 독서계에 광풍을 몰아왔던 세편의 글이 있다. 1956년 1월호에 실린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이글은 함석헌이 사상계에 발표한 최초의 글이다. 필자 주) 두 번째 글이 1958년 8월호,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이고, 세 번째 글이, 저 박정희로 하여금 “이런 놈의 늙은이가…”하게 한 ‘5.16을 어떻게 볼까?’이다. 이 세 편의 글은 사상계를 통해 함석헌이 내놓은 글 중에서도 민중들 가슴에 함석헌을 “선생”으로 각인시킨 대표적인 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함석헌의 인생노트, 사상과 철학, 종교와 역사, 심지어 일 년 가까이 계속되는 종교적인 논쟁들이 없지 않았지만 위의 세 편의 글은 사상계를 세계적인 학술자이면서 동시에 민중지(民衆紙)로 자리매김 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했다. 물론 사상계는 그 규모로도 세계적이라 할만 했다. 4.19 수 년 전부터 사상계는 2~3000부의 발행을 이어왔고, 자유당 말기에는 5만부, 4.19 다음호는 10만부에 육박했다. 「한국문정제책」(韓國文政製冊) 사장 박종호(朴鍾鎬)는 “사상계의 제책이 끝나 물건을 출하할 때는 마치 한 산(山)을 옮기는 것 같았다”고 술회했다. 그런데 이 같은 사상계의 확대, 확장이 함석헌의 글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졌다고 50년대, 60년대 사상계의 편집과 업무를 담당했던 실무자들은 증언한다. 

박정희의 「힘」에 또 다른 하나의 거대한 「힘」으로 정면충돌을 감행한 사상계가 터트린 포탄(?)이 바로 함석헌의 그 세 번째의 글 “5.16을 어떻게 볼까?”였다. 박정희가 제2공화국을 전복시키는 군사반란에 목숨을 걸었듯이 함석헌 또한 그 군사반란의 수괴 박정희의 저지에 목숨을 걸었다. 함석헌의 이 글, ‘5.16을 어떻게 볼까?’가 사상계를 통해 발표되기까지의 과정을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흑암의 시대를 밝히는 글 한 편이 발표되는데 얼마나 숨막히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인가를 말이다. 

박정희의 군사반란이 성공(?)하면서 「思想界」의 장준하(張俊河)는 일주일여 깊은 고민 속에 빠져있었다. 사상계사의 대표인 공인으로써 가부간 ‘5.16’을 증언해야하는 역사적인 과제 때문이었다. 장준하가 알고 있는 박정희는 비교적 분명한 것이었다. 개인적인 교류는 전무한터였지만 그가 만주군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 것, 盡忠報國滅私奉公(진충보국멸사봉공)이라는 혈서를 쓰고 군관학교를 입교했다는 것. 군관학교 졸업생 대표로써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면서,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는 선서를 했고, 전체수석으로 군관학교를 졸업한 자라는 사실을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시에는 졸업식장에서 교장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로부터 “박정희군은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 다운데가 있다”는 극찬을 받은 자라는 것까지 이미 정보를 구할 수 있는 대로 수집해 놓은 터였다.  

장준하는 박정희를 용납할 수 없었다. 장준하는 편집위원 중 몇 사람을 비공식적으로 만났다. 자신이 준비한 박정희에 대한 인적자료를 전하면서, “다음호에는 5.16에 대한 평가와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혀야 되겠는데, 도움을 좀 받고자 해서 뵙자고 했습니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좀 해주십시오”

이렇게 특별히 생각을 함께한다고 느껴지는 몇 사람의 의견을 경청한 장준하는 두 가지를 전제로 5.16을 ‘불가피한 일’로 수용하게 된다. 그 두 가지 전제란 박정희의 공약 속에 담긴 “공산주의 책동을 타파하고”와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민주주의를 실현하기위해 5.16의 주도자들은 일체의 야욕을 버리고, 최대한 단시간 안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고, 군 본연의 자리로 복귀한다는 공약만은 믿고 싶었다. 게다가 박정희의 혁명(?) 공약 중 “반공을 제1 의로 삼”겠다는 약속이 장준하의 신뢰를 더하게 했다. 

장준하는 시급히 이미 인쇄소에 들어가 있는 6월호 원고에 권두언을 새로 써 넣었다. <五·一六 革命과 民族의 進路>라는 글이었다. 후에 박정희의 군부정치에 저항하는 민주전선의 인사들로 부터 논란이 일었던 글이다. 군사반란을 혁명으로 시인했다는 것이었다. 장준하는 자신의 그 권두언에 일정한 비판과 잡음이 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4.19 혁명이 입헌(立憲)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 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는 5.16 혁명에서는 4.19 혁명의 부정이 아니라, 그의 계승, 연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박정희의 5.16 반란을 ‘불가피한 것’으로 수용한 사상계 6월호가 시중에 배포되자 광복군출신으로 현 군부에 있는 지기(知己)들로부터 극비의 충언(忠言)이 전해지기 시작한다. 그 지기들 중에는 장성도 있었다. 은밀히 전해주는 그 충언의 내용들은 대부분이 “죽기로 맘먹고 일으킨 쿠데타인데 권력을 포기하겠느냐? 원대 복귀란 철저한 허언(虛言)이요, 속지 마시오”하는 것이었다. 

몇 차례 이 같은 귀뜸을 받으면서도 그래도 장준하는 박정희의 소위 그 「혁명공약」만은 믿고 싶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지고 있었다.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 4가 70번지에서 였다. 원효4가 버스종점에서 하차하며 성심여고 편을 향해 한 5분쯤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면 마치 한 촌의 초가를 연상케 하는 열 대 여섯 평의 그야말로 빈민가옥으로 장준하가 깎듯이 ‘선생님’하는 함석헌의 본가다. 

함석헌은 6월 중순쯤부터 한 글을 구성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군사반란을 향한 저항을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함석헌에게는 박정희의 ‘긴 칼’놀음과는 다른 ‘참의 힘’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필자가 이미 언급한 대로 우주의 배후에 ‘참’을 향해 흐르는 ‘절대의지’를 철석처럼 믿는 이었다. 그런데 여기 원효로 4가 70번지에 6월 중순이 지난 어느 날 장준하가 함석헌을 찾아온다.  

“선생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도 혁명과업은 좀 도와야지 않겠습니까?” 장준하의 말이었다. 한참 말이 없던 함석헌은 아주 조용한 음성으로 답하는 말이 이랬다.

 “장사장의 진심 결코 의심하지는 않소. 그러나 방법은 하나지요. 군인들이 왜 정치를 간섭합니까? 박정희가 할 일은 곧 군대로 돌아가는 것이요. 다음일은 걱정 말라 하시오. 다 민중이 알아서 합니다.” 

돌아서는 장준하의 가슴은 천근의 중압에 눌리는 듯 했다. 7월호에 실릴 글을 부탁했는데, 그것도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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