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생활 에세이 연재
쪼리와 맨발<말리의 늦게 가는 세상>
임정훈 | 승인 2017.04.03 14:36

무심히 내 발을 바라본다. 검게 그을린 뭉뚝한 발. 그 위에 선명하게 그려진 쪼리 자국이 있다. 발을 보고 있으니 이젠 나도 동티모르 사람이 다 된 것 같아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가 핀다. 

쪼리는 엄지 발가락과 둘째 발가락 사이에 줄을 끼운 아주 단순한 형태의 신발이다. 디자인과는 거리가 멀고 원시적인 분홍, 빨강, 파랑, 초록 같은 색깔의 줄로  멋을 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색이 아름답게 두드러져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쪼리는 그냥 쪼리 일 뿐이다. 이런 신발을 동티모르 사람들은 아주 즐겨 신는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청년도, 길가에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는 동네 아주머니들도, 가족 나들이를 나선 여느 가족도 모두 쪼리를 신고 있다.

이렇듯 동티모르의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쪼리를 신고 있으니 쪼리는 가히 국민 신발 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어디를 가든지 쪼리를 신고 간다. 이곳에서는 쪼리를 신고 못갈 곳은 아무 곳도 없다. 나도 처음에는 차마 쪼리를 신고 나가기가 민망하여 쪼리는 주로 집에서만 신었다. 동네에 나갈 일이 있으면 샌들이나 운동화로 바꿔 신고 나갔다.

이처럼 신발을 갖춰 신는 것이 나름 예의로 알고 있던 내가, 쪼리를 신고 거침없이 어디든 갈 수 있었던 것은 지난 년 말 송구 영신예배를 드리고 온 후부터이다. 그날은 자정이 되면서 1부는 테툼어, 2부는 영어로 송구영신 예배가 진행되었다. 참여한 성도들이 다함께 드리는 예배인 만큼 경건하리라 생각했던 송구영신 예배에 동티모르 목사님은 맨발로, 호주 목사님은 쪼리를 신고 오셔서 나는 그 모습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새해의 메시지를 기쁨으로 전하시는 두 분의 목사님 말씀 보다는 맨발과 쪼리를 신고 예배당에 서 있는 두 분을 생뚱하게 바라보며 나는 예배에 집중하지 못했다. 내가 왠지 바리새인 같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였다. 그 후로 나는 쪼리를 편하게 신고 다니게 되었다. 마치 걸치고 다니던 허물을 벗어 버린 것처럼 신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쪼리는 장점이 많으면서도 서민적인 신발이다. 일단 가격이 저렴하다. 발이 편하고 땀이 나지 않으니 발 냄새가 나지 않고 시원하면서 가볍다. 또한 다른 슬리퍼처럼 걸을 때 소리가 나지 않아서 좋다. 그렇지만 동티모르 사람들이 모두가 쪼리를 신고 다니는 것만은 아니다.

학생들은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오고, 대부분 사람들은 구두를 신고 출근을 하며  특별한 날에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구두를 신고 다닌다. 그렇지만 학교나 직장 밖 세상에서는 모두들 쪼리를 신고 있다. 그도 아닐 때는 신발을 벗은 상태인 맨발이다.

쪼리를 신지 않은 사람들은 맨발로 어디 든 자유롭게 다닌다. 나는 아직까지 맨발로 다니다가 발을 다쳤다는 사람은 본적이 없다. 어른도 아이도, 남자도 여자도 편 한데로 맨발로 다닌다. 습관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가난하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우리학교 입학식이 있었다. 나는 신입생들 사진을 찍다가 깜짝 놀랐다. 유독 한 학생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신입생들은 입학식이라고 나름 멋을 내고 학교에 왔다. 양말을 신고 운동화도 깨끗하게 빨아 신고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 중에 쪼리 조차도 신지 않은 한 학생이 맨발인 채로 학생들 속에 당당히 서 있었다. 나는 그 학생의 모습에서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 아버지는 농업고등학교를 나오셨다. 가난한 농군의 맏아들이었던 아버지는 학교에 가기 위하여 준비하는 교복이나 운동화 보다는 월사금을 내는 일이 먼저였다. 아버지는 운동화도 없이 맨발로 학교를 다니셨다고 말씀 하셨다.

동티모르처럼 사철이 더운 나라에서는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사계절이 뚜렷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맨발은 어땠을까. 짐작조차 어려운 아픔을 가늠해 볼 뿐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한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시면서 우리 육남매를 가르치셨다. 무엇으로도 잴 수 없는 아버지의 그  힘은 맨발에서 나온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이곳에서 동티모르 사람들을 볼 때나, 우리의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가난하다고 불행한 건 아니다. 가난하다고 꿈까지 가난한 것도 아니다. 이들은 맨발일지라도 가슴이 뛰고 꿈이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을 보며 맨발의 꿈을 의심치 않는다.

요즈음 내가 신고 다니는 쪼리가 신을 때 마다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외출 할 때 신고 나가기는 하지만 왠지 길가 어디에서 끈이 빠지거나 끊어질 것 같다. 그런데 예전과 달리 불안하지 않다. 끈이 빠져 못 신게 되면 맨발로 걸으면 된다. 

세상을 향해 맨발로 걸었던 아버지처럼, 입학식 날 당당히 서있던 그 학생처럼 부끄럽지 않은 맨발로 걸으면 되는 것이다. 여기 동티모르 사람들처럼.

 

<임정훈>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 딜리의 한 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음

임정훈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윤인중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인중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