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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세계관 - 죽음과 죽음 이후 (5)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㉘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21.08.1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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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에서 ‘요한계시록’만큼 독자들을 매료하면서도, 당혹스럽게 하는 책은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이 매혹적인 것은 세상의 종말이 닥치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진노를 쏟아 내 대규모 재앙과 파멸을 내려 모든 악의 세력, 즉 사탄과 그의 사자들, 나아가 저승과 사망 자체까지도 철저하고도 가차 없이 멸망시킬 그 때에 펼쳐질 광경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독자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사용되는 다층적인 상징들도 그렇지만, 제목이 ‘계시록’인데 도대체 무엇을 계시하는 건지 아무도 명확하게 알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요한계시록에 대한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견해들을 제시해 온 것이지요.

과연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이른바 ‘적그리스도’는 조만간 나타날 것인가? 숫자 666으로 대표되는 신비로운 ‘짐승’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아마겟돈이 일어날 거라고 내다봐도 좋은가?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 혹은 숫자 666이 히틀러나 사담 후세인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중심으로 수없는 논쟁이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 맞는 해석은 없었습니다. 미리 말씀드린다면,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다른 모든 책들과 마찬가지로, 당대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지, 미래를 예언하는 책이 아닙니다. 따라서 저자가 어떤 의미로 이 책을 썼는지 이해하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해당 시대의 역사적 맥락에 가져다 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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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요한복음서 저자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고, 계시록의 저자는 당시 유행했던 ‘묵시문학’이라는 장르를 차용하여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묵시문학’ 형태를 취한 글들은 마카베오 전쟁부터 기원후 2세기 사이의 400여년간 크게 흥한 장르였습니다. 요한계시록 외에도 ‘에녹1서’, ‘다니엘서’, ‘에스라4서’ 등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묵시문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후대 기독교가 받아들인 천국과 지옥 개념이 계시록에 나오는 천국 같은 예루살렘, 성도들이 영원히 거할 장소, 진주로 된 대문과 금으로 만든 길이 있는 도성(계 21,21), 그리고 죄인들의 종착지인 영원한 ‘불의 못’에 대한 무시무시한 묘사에(계 20,10) 깊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드러난 사후 세계 이미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요한계시록 서사의 전체적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환영인 ‘인자 같은 이’가 나타나, 계시록의 저자에게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일곱 교회를 격려하고 권면하는 편지를 쓰라고 지시하고, 앞으로 목격할 환영을 미리 설명해 주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본격적인 계시는 4장에서부터 시작하는데,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손에 일곱개의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 문서가 들려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하나님에게서 두루마리를 넘겨받아 봉인을 차례차례 떼는데, 그 때마다 이 땅에 전쟁과 기근, 경제적 붕괴, 죽음 등 대규모 재앙이 하나씩 벌어집니다. 마침내 여섯째 인을 떼자 우주적 재앙이 벌어지는데, 태양이 검게 변하고 달은 붉은 빛을 띠며 하늘에서 별이 후드득 떨어지고 하늘이 사라져 버립니다. 우주적 파국이지요.

그런데 일곱 번째 봉인을 떼자 새로운 일련의 재앙이 전개됩니다. 하늘에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무시무시한 짐승들이 나타나 세상을 황폐화합니다. 엄청난 수의 사람이 죽거나, 말도 못할 고통을 당합니다(계시록 8-9장). 이른바 짐승, 적그리스도가 거짓 예언자와 함께 출현하여 우주를 파멸시키는 것이지요.

그러자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와 그가 이끄는 천국의 군대가 짐승에 맞서 최후의 우주적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는 순식간에 압도적으로 승리하고, 짐승과 거짓 예언자는 ‘유황불이 붙는 못’에 던져집니다(계 19-20장).

그후 그리스도는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한 수많은 순교자들과 함께 이 땅을 천년동안 통치하십니다. 천년이 흐른 후, 사탄은 잠시 풀려나 이 땅에 일시적으로 환난을 일으키지만, 마침내 붙잡혀 불의 못에 던져지고, 그곳에서 짐승과 거짓 예언자와 함께 밤낮 괴로움을 받습니다(계 20,10).

그 다음에 최후의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모든 인간이 심판을 받기 위해 죽음에서 일으켜집니다. 생명의 책에 자기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상을 받고, 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불의 못에 던져집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새 예루살렘은 온통 금으로 만들어졌고, 사방에 진주로 만든 대문도 있는, 넓이가 1500평방마일(약 3800㎢)에 달하는 엄청나게 큰 곳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어린 양이 빛을 발하기 때문에, 불을 밝힐 필요도 없습니다. 더 이상 두려움도 어둠도 없고, 고통과 불행, 고난, 눈물도 없는, 영원히 기쁨만 누리면 되는 곳입니다. 선이 영원히 다스릴 것이며, 의로운 자들은 그 빛에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계 21-22장).

▲ 밧모섬에 유배 당한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보고 있다. (14세기경)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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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대강의 전개입니다. 난해하고, 긴장되고, 충격적인 환영들이 등장하는 계시록의 어떤 장면도 종말의 때에 순서대로 일어날 일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들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도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일곱머리 달린 짐승은 일곱 언덕에 세워진 도시로 유명했던 로마를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적인 사탄이 지배하는 도시, 이 땅의 경제적 착취(그래서 음녀는 호화로운 옷을 입고 많은 장신구를 걸치고 있습니다), 기독교도 박해(음녀가 순교자들의 피에 취하는 구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모두에 책임이 있는 도시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저자가 보기에 하나님의 적은 로마 제국과 그 황제들입니다.

특히 주후 54년부터 68년까지 통치한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황제들 가운데 최초의 대적으로 간주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추진한 무자비한 기독교 박해가 참혹한 피의 순교를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그의 히브리 이름 ‘카이사르 네론’(Caesar Neron)을 숫자로 변환하면 666이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숫자 666은 단어와 이름의 숫자 값을 셈하는 해석법인 게마트리아(Gematria)라는 고대의 문학 해석형식을 따라, 네로 황제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지, 한 때 한국교회를 떠들썩하게 한 무슨 악마의 바코드 번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은 독자들이 은유적으로 해석하도록 의도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짐승이나 음녀가 로마 제국과 제국의 황제들을 의미한 것이듯이, ‘불의 못’도 죄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고문이 아니라, 다음 생에 대한 어떤 희망도 없는, 죄인들의 완전하고도 영원한 궁극적 소멸의 상징이라고 할 것입니다.

짐승으로 불리는 왕들과 그의 장군들이 던져질 ‘유황이 타오르는 불바다’는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처음 나옵니다. 불과 유황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뜻하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창세기까지 거슬러 가면 거기서도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극악무도한 죄인들에게 불과 유황을 비처럼 내리고 있습니다(창 19,24).. 에스겔은 신비로운 곡의 왕국이 종말의 때에 비슷한 운명을 맞을 것을 묘사합니다(겔 38,22).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이 악한 자들에게 숯불과 유황을 내릴 거라고 말합니다(시편 11,6).

그 반대로 순교자들은 되살아나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이 땅을 다스립니다(계 20,1-6). 그런데 주목할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짐승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목 베임을 당한 자들’(계 20,4)에게만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누릴 운명이 아닙니다. 그들도 따로 영광을 누릴 날을 맞겠지만, 그날은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 천년의 시간을 누린 뒤에야 올 것입니다.

죽은 자들(악한 자든 의로운 자든)이 받을 심판은 요한계시록 20장 11절부터 15절까지 간명하게 묘사됩니다. ‘크고 흰 보좌’가 준비되어 있고, 그 위에 않아계신 분 앞으로 모든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불려나갑니다. 그리고 책들이 펼쳐져 있는데, 모든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계 20,12). 누구든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저주를 받아 불바다에 던져집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죽음과 지옥 자체도 마지막으로 불바다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저자는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계 20,14). 죽은 사람들이 각각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 것이 첫째 죽임이라면, 죽음과 지옥 자체의 죽음은 둘째 죽음이라는 것이지요. 죽음 자체가 죽음에 던져지고, 불바다인 지옥 자체가 불바다에 던져진다는 것은 상상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모든 존재의 궁극적 파멸을 묘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적이며, 그래서 죽음은, 죽은 자들이 속한 세계 전체와 함께 영원히 멸해진다는 것이지요. 불바다를 두번째 죽음이라고 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미 죽은 인간 모두를 포함해, 죽어 있는 모든 것의 최종적 소멸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복수는 성도들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받게 될 영광을, 죄인들이 자신들도 누릴 거라는 희망도 없이, 완전히 소멸되게 하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은 힘들 때나 좋을 때나, 심지어 박해와 순교를 당하면서도 꿋꿋이 하나님 편에 섰던 자들에게만 옵니다.

하나님은 모든 적들과 그들이 거하던 세상이 멸망한 후,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입니다(계 21,1).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입니다(계 21,3-4).

믿음 안에서 죽은 이들 모두에게 약속한 죽음 이후의 세계는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나라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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