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 레이까지 완주하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크리스토 레이 정상까지는 걸어서 족히 네 시간은 걸릴 거라 했다.
한낮의 더위가 만만찮은 딜리에서 네 시간을 걷는 것은 무리다 싶다.

하늘이 참 맑고 깨끗하다.
날씨가 변덕만 부리지 않는다면 걷기에 딱 좋은 날이다.
일단 나서자. 동행자가 없어도 좋다.

신정연휴라 그런지 거리가 한산하다.
이웃집 레나는 오늘도 쉬지 않고 가게 문을 열었다.
새해 축복 인사를 나누고 행선지는 웃음으로 알렸다.

바닷가로 향해 걷다보니 거리에서 무언가 두리번거리는 것이 보였다.
개 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돼지였다.
새끼 돼지가 먹을 것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딜리는 동물들의 천국이다.
길을 걷다보면 개, 닭, 돼지, 염소 등 종류별 집짐승은 모두 만난다.
그중에 개는 언제나 무섭다.

새벽에 쓰레기통을 뒤지다 먹을 것을 찾지 못한 개가 화가 나서 간혹 사람을 무는 경우가 있다. 어느 분도 아침에 산책을 하다가 개들에게 물려 싱가포르에 있는 병원까지 가서 치료를 받고 오신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골목을 돌아서니 멀리 버거킹이 보인다.
버거킹은 외국 기업으로 들어 온 딜리의 유일한 패스트푸드 점이다.

나는 패스트푸드 점에서 파는 오백원짜리 소프트콘을 좋아한다.
오늘까지 휴일인지 버거킹 문이 굳게 닫혀있다.
아쉽지만 다음에 지나갈 때는 꼭 소프트콘을 사먹어야지.

바닷가에 서니 맞은편에 아따우로 섬이 보이고, 저편으로 크리스토 레이가 보였다.
크리스토 레이로 가는 길은 딜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크리스토 레이는 딜리의 동쪽으로 바닷가가 끝나는 지점 언덕에 서 있는 예수상을 말한다. Cristo rei라는 말은 포루투갈 말로 Christ the King 이라는 의미이다.

동티모르는 포루투갈의 긴 식민지가 끝나자 이어 인도네시아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인도네시아는 1976년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편입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딜리 동쪽 해변에 예수상을 세웠다.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인구 92% 이상이 카톨릭 신자인 동티모르 딜리에 27m의 대형 예수상을 세워 준 것이다. 이 예수상은 브라질 리오 데 자네이루에 있는 예수상 다음으로 세계에서 큰 예수상이라고 한다.

걷다보니 바닷물 속에서 수영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도 그냥 아이들과 물속에서 첨벙거리며 놀고 싶다.
때론 어른이라는 옷이 무척이나 거추장스러울 때가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기 위해 배를 띄우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고, 낚시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런 날은 낚시도 좋을 듯하다.
뭔가 낚시하는 모습이 어설퍼 뭐가 잡히기나 할까 싶기는 하지만.

형제는 모래사장에서 플라스틱 통 하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자매가 나를 보고 달려와서 내 앞에 수줍게 섰다.
아이들의 모습은 언제나 천진하다.

청년들이 바닷가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다가 나를 보고 인사를 하며 아는 체를 한다. 그들의 사랑스러운 모습도 젊음도 좋다.  상냥한 젊은이들을 만나고 나서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도 걷다보니 태양은 점점 더 뜨겁게 내리 쬐고, 부실한 왼쪽다리에 힘이 슬슬 빠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크리스토 레이까지 걷기에는 무리한 일이었다.
그럴 요량이었으면 동트기 전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어야 했다.

내가 저 길을 꼭 걸어 완주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찻집인가 싶은 빨간 집 까지 만 걷기로 하고 돌아 서기로 하였다.
남은 길은 다음에 걷기로 하자.
때로는 무모한 고집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다.
돌아서니 마음이 편했다.
돌아오는 길은 바닷길이 아닌 마을길을 택했다.
모래사장에서 놀던 아이가 어느새 나를 보고 달려와 활짝 웃으며 내 앞에 섰다.

마을길은 바닷길에서 볼 수 없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동네 곳곳에 아기 예수의 모습을 만들어 놓은 마구간이 보였다.

동티모르 사람들은 마을 마다 성탄절이 되면 서로 돈을 추렴하여 말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마구간에 만들어 놓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드린다.
마구간은 마을 사람들의 공동 작품이므로 동네마다 그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

말구유 앞에서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을 보고 아이 하나가 다가왔다.
아이에게 이름을 물었다.
아이는 야무지게 자신의 긴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동네에 꾸며진 성탄절 축하 모습이 자랑스러운 듯 그 앞에 섰다.
아이는 사진 속에 모델을 흔쾌히 받아 주었다.

길가에서 아저씨 한분이 반갑게 인사를 하며 나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다.
한국 사람이라고 했더니 한국, 일본, 중국은 얼굴이 같아서 잘 모르겠다고 하여 함께 웃었다. 길가에 서서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새해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비록 크리스토 레이를 완주도 못하고 돌아선 길이지만
아이들의 얼굴에서 평화로운 세상을 본 것으로 족하다
늦게 가지만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꾸며 가는 세상을 본 것으로 충분히 족하다.

새해다.
동티모르 사람들과 더불어 웃고 우는 자로 한해를 보내고 싶다.

돌아서 오다보니 어느새 내가 다니는 마트가 보였다.
반갑다. 들어가는 길에 하스 (mango)나 좀 사야겠다.

임정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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