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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하고 선하고 조용한 성품들만 지사(志士)가 되더라<전순란의 휴천재일기>
전순란 | 승인 2016.10.10 11:35

2016년 10월 8일 토요일, 맑음

아들 하나 오니까 보스코가 뱃장이 두둑해진다. 아침기도를 하는데 아들이 올라와서 티벳 요가도 못한 채 밥상을 차리니까, 그것도 운동이라고 구실만 있으면 안 하려고 빼는 ‘울 냄편’이 은근히 좋아하며 표정관리에 바쁘다. 아들들이 오면 무슨 뒷심이 생기는지 마누라에게 “안 먹어!” “안 할래!” “싫어!”를 연발하므로 역시 남자에게는 자식들이 방패막이구나 싶다. “젊어서 얻은 아들들은 전사의 손에 들린 화살들 같구나. 성문에서 적들과 말할 때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는 시편(127,4-5) 구절이 있다지만, “내가 낳아준 아들들을 갖고 나한테 행세를 하려들다니!” 하는 생각에 “쟤들 가기만 해 봐라.”하고 벼른다.

간밤에 아래층 두 남자(빵기와 엽이)가 다 늦었기에 누가 더 늦었나 따졌더니만 엽이가 “형님이 한 시 넘어 들어오는 소릴 들었어요.” 한다. 그래, 빵기도 오랜만에 귀국하면 찾아볼 사람도 어지간히 많을 게다. 그런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사회적 영역을 넓히고 또 유지할 게다. 사내들은 친구 숫자로 그 영역을 가름한다니까.

오늘 엄엘리사벳과 함께 맘고생을 했던 친구들이 ‘빵기네집’을 찾아왔다. 엘리사벳은 밖에 나가서 식사하고 집에서는 차나 대접받고 싶다고 했지만 영어(囹圄)의 몸으로 고생을 한 사람들에게 밥이라도 한 끼 먹이고 싶어 집에서 장만을 했다. 경희씨, 사옥씨, 지영씨 셋이서 나를 도와 부엌에서 수선스레 남편들을 위하여 음식을 장만하니 이 또한 아낙들의 즐거움이다, 더구나 여러 해 떨어져 지내야 했던 남편들을 위해서라면. 그들도 식당 주인 눈치 안보고 스스럼 없이 맘놓고 지내는게 마음 편하고, 나 역시 집에서 손님을 맞고 정담을 나누는 게 더 좋다.

오늘 손님 중에 채은이라는 꼬마아가씨가 있었다. 아빠랑 얼마나 찰떡 궁합인지 제 아빠 귀에 대고 ‘내 사랑’이라고 부른다나. 오늘도 한시도 아빠 곁을 떠나지 않고 바싹 붙어 앉는 열 살짜리를 귀염둥이를 보면서 그동안 저 아이에게서 아빠를 뺐어갔던 인간들이 더 밉다. 또한 보스코에게 딸을 낳아주지 못한 나로서는 미안한 생각도 든다.

오늘 처음 보는 두 남자는 둘 다 보스코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착하고 조용하고 순하면서도 불의에 분노하고 정의에 투신하는 사내들. 기득권자들의 개 노릇을 하는 언론은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자도, 독립만세를 부른 백성도, 군사독재에 항거해온 사회운동가들도 모조리 불만과 악의와 편향된 이념에 찬 사람들로 묘사하고 매도해 왔지만, 내가 아는 지사(志士)들은 한결같이 순하고 선하고 조용한 성품들이었다. 저렇게 착하고 여린 사람들이다 보니 고난 받고 불의에 희생당하는 이웃을 보아 넘길 수 없고 갈라진 조국을 참고 견딜 수 없어 투쟁과 고난을 감수하면서, 자청해서 감옥과 죽음의 길로 나서나 보다.

그들이 돌아갈 무렵에 집에 들어온 빵기는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가 아빠의 회전의자를 고치고, 흔들거리는 옷장의 밑을 괴어주고, 아빠의 숙원사업인, 라디오 스피커 줄을 길게 이어 옷장 위에 올려놓아주고서 친구와 저녁을 먹으러 다시 외출하였다. 

이층에 올려놓은 세탁기(캐나다 간 문교수님 선물)가 수평을 미처 못 잡아 마루 전체를 돌아 다니자 보스코가 펜치와 스파나를 들고 수습하려고 애를 쓰는데 저러다 바로잡기는커녕 일을 낼 것 같아서 제발 참으라 말렸다. 내가 남편을 너무 못 믿는지 모르지만 차라리 그 시간에 글을 써서 기술자를 부르는 편이 안심이겠다.

지리산과 산청엔 오늘도 비가 온다니 ‘산청한방축제’ 내내 하늘이 심술을 부리는 편이어서 구경 가는 사람이나 기다리는 사람이나 힘든 나날 이었다. ‘귀요미’ 미루도 별로 재미를 못 보고 상당히 지친 듯하다. 한복을 얌전히 입고서 매장을 지키는 이사야의 사진을 보고서 보스코는 ‘불쌍한 이사야’를 연발하고, 귀요미는 질세라 ‘불쌍한 대사님’(아내에게 들볶이는?)이라고 응수하며 문자가 오간다.

날씨가 갑자기 차진다는 예보. 3층 다락에서 빵기 이불을 찾아내서 가져다주고 나도 옷을 두툼하게 챙겼다. 어두운 시국에 각박하고 원통한 나날을 보내는 이들이 몸보다 맘이 추울 다가올 겨울이 나 또한 두렵다.

전순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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