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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張俊河)와 박정희(朴正熙)<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9.09 18:26

해방 전후 양인(兩人)의 족적(足跡)을 중심으로(2)

장준하는 그 아내가 된 희숙에게 약속한대로 일군에 입대했다. 이등병으로 일본군 「제42부대」입소, 20여일 간의 신병훈련을 마쳤다. 희숙이 한번은 아버지와 또 한 번은 어머니와 삭주대관에서 이틀 길 기차를 타고 면회 차 다녀갔다.

“20일간의 훈련을 마치게 되면 곧 바로 정규부대로 배치될 것이다. 나는 반드시 중국으로 전속이 될 것이고, 중국으로 전속이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일군을 탈출하여 우리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을 찾아갈 것이다. 만일 내가 일군을 탈출하게 되면 이후 집으로 보내는 내 편지 맨 끝에  로마서 9장 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하는 말씀을 써 붙일 것이다.”  

희숙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어머니도 함께 들으시는 말이었다. 장준하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하는 말이었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그 말을 가슴에 묻었다. 아들이 말하는 그 길이 어쩌면 죽음의 길 일런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찾아서 간다니…….

아들은 매사에 그랬다. 더 할 수 없는 효자로 자란 자식이었지만 한번 해야겠고, 해야 한다고 맘먹은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무를 줄을 몰랐고, 또 지나고 보면 거의 언제나 아들의 선택이 옳아 왔기 때문에 이번 며느리에게 하는 말도 조심스럽게 들어 담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김경문(金京文)은 종종 준하의 언행에 놀라는 때가 자주 있었고, “저건 하늘이 낸 거지, 내 자식이 아니지…”하곤 했다. 섭섭함과 뿌듯함이 이상스럽게 교차했다.

드디어 1944년 2월 13일, 장준하는 「제42부대」를 떠나 중국 강소성(江蘇省)의 서주(西州)에 주둔해 있는 「일군보충대」로 전속하게 된다. 장준하의 그 “조국을 위해 죽게 해 주소서”하는 타는 가슴의 불기도가 응답된 것이었을까...

어쨌든 장준하는 중국 진입에 성공했고, 중경을 향한 꿈의 실현이 한 발작 가까워졌다고 느껴졌다. 이 「강소성일군보충대」에서 복무하는 동안 장준하는 탈출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야외훈련이 있는 때는 더욱 그랬다. 훈련 지역의 중국주민과 중경에로의 노선을 어렵게 문자로 나누기도 했고, 방향을 익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헛일 같기도 했다. 6월 1일 「쓰까다부대」로의 전속명령이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쓰까다의 주둔지가 「서주보충대」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가량의 도보행군거리에 있는 곳이어서 그간 3개월 동안의 지리탐구가 허사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일견 감사했다.

이곳 「쓰까다부대」는 조선인출신 들에겐 특이한 곳이었다. 중국지역 일본군 주둔부대에선 병사들의 탈출사고가 간단없이 계속 되었는데, 그 탈출병은 대개의 경우 조선 출신들이었다. 쓰까다부대는 이 같은 사고의 방지를 위해 존재하는 부대로, 일본사관들 중에서도 소위 황국 보위에 실력있다 평가받는 엘리트들을 차출해 일종의 정신교육을 시키는 곳이었다.

장준하를 포함 200여명의 대원이 이곳으로 이동되었다. 지금 대대적인 적성훈련이 진행 중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나 거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철벽을 뚫고 기어이 탈출해나간 「조선놈」이 있었다. 그가 후에 장준하와 유일무이한 친구가 되는 「김준엽」이었다. 이후 장준하와 김준엽, 김준엽과 장준하의 관계는 가히 하늘이 시샘할 정도였다. 이런 정도의 관계였다. 그가 후에 해방조국에서 정권으로부터 총리니 장관이니 하는 여러 제의를 받게 되는데 그때마다 그의 대답은 “내가 그래도 장준하의 친군데…”였다. 그 쓰까다부대 탈출 1호 김준엽을 이어 탈출2호로 기록되는 것이 장준하였다.

바로 그때의 일군작전장교(日軍作戰將校) 박정희

   
▲ 일본 육사 시절의 박정희

장준하가 망국의 한에 광복의 꿈을 번갈아 품으며 황국의 「특수부대」 쓰까다를 탈출할 때, 이미 역사로부터 배제된 한 조선사내(?)가 있었다. 그가 신성일황(神性日皇)을 주창하는 박정희(朴正熙)였다. 필자가 그를 “역사로부터 배제된”자로 단언하는 것은 광복직전 또는 직후 그의 족적(足跡)을 보고 하는 말이다. 하늘이 주는 삶, 역사가 주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은 그 삶에 대해 더 할 수 없는 자존감을 갖는다.

현실적으로 그가 그 역사의 삶, 하나님의 삶 때문에 무소유가 되고 전신이 가죽채찍 쇠살에 찢기어 피투성이 된다 해도 그래서 마냐한 광야의 잡초 속에 묻힌다 해도 절대의 자유 속에 영원을 간다. 삶이란 그렇게 값지고 존귀한 것인데 도대체 어떻게 박정희는 그렇듯 반역사(反歷史) 곧 역천의 세월을 살 수 있었던 것일까? 어떻게 그렇듯 삶의 성성(聖性)을 짓밟아 버릴 수 있었을까?

장준하가 일본군의 특수부대 「쓰까다」를 탈출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향해 물, 들, 산을 건너며, 넘으며, 내달리고 있을 때, 박정희는 중국의 열하성 남부 승덕(承德)의 반벽산에 위치한 「보병제8단」에 복무하고 있었다. 단장은 중국인 출신으로 당제영(唐際榮)이라는 상교(上校, 대령에 해당)였고, 단원은 약 300명, 주 임무는 북경의 북경의 북동 밀운(密雲), 평곡(平谷), 준화(遵化) 일대에 본거지를 두고있는 모택동 휘하의 제 11, 12, 13단의 토벌을 주 임무로 하고 있었다. 이 지역의 항일 세력은 아주 다양했다.

“국민당 정부의 국부군관 군벌군, 독립적인 유격군, 심지어는 만주 일대의 삐적들까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항일주력은 물론 중국인었으나 조선인항일조직(朝鮮人抗日組織)도 눈부신바 있었다. 임시정부의 광복군, 연안의 조선의용단 혹은 독립된 게릴라부대로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국부군 혹은 중공군과 함께 항일유격전을 벌렸다. 조직의 구성과 이념은 달랐지만 당시 조선인 항일부대의 목표는 우선 한 가지 일본에 대한 무력항쟁과 조국의 광복이었다”(박정희실정백서 「그러나 역사가 그들을 단죄할 것이다」 2000.12.5.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 p30)

일본군 「열하제8단」은 이 같은 항일세력의 진멸을 위해 존재하는 부대였고, 박정희는 이 제8단 단장의 작전(作戰) 부관이었다!

박정희가 항일유격대의 토벌작전에 참여한 것은 2-3개월이었고, 실제로 수행한 역할은 토벌작전 수립의 부관으로 10여 개월을 복무했다. 어떻게 항일독립군세력을 토벌할 수 있을 것인가? 단장의 작전부관은 8단의 지휘관들의 전략회의에 반드시 참석해 그 전략을 숙지하고, 일간 수립된 지침을 예하부대에 전달, 작전에 임하게 하는 것이다. 주목해야할 것은 그가 일선의 소대장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독립군들을 직접 사살한 경우는 없었다 해도(박정희는 2개월이 조금 넘는 기간 일선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필자주) 그가 참여해서 수립된 그리고 작전부관으로서 예하부대에 시달한 그 작전에 의해 직접사살에 비할 수 없는 무수한 항일독립군들이 주검이 되어갔다는 사실만은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열하보병 8단의 그 지구는 만주와 중국대륙을 잇는 군사적요충지로 일본군에 대한 항일세력의 저항이 끊임없던 곳이었으니 말이다.

작전부관 박정희가 시달한 그 전략이 적중하여 항일세력 사살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때 박정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작전이 실패했을 때 그것은 마치 자신의 인과처럼 불안해  해야했다. 그러나 그의 작전부관으로서의 소명자세는 누구도 그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철저한 작전, 철저한 전승! 박정희는 결코 한국사람이 아니었다.

박정희가 그렇듯 중국의 팔로군, 조선인 의용군, 임시정부의 광복군을 토벌할 때 ‘순조선놈’ 장준하는 「스까다」의 탈출에 성공하여 불로하(不老河)의 중국중앙군 소속인 한치륭(韓治隆) 부대를 거쳐(이 한치륭 부대에서 장준하는 스까다 1호 탈출자 김준엽을 만나게 되고, 여기서 함께 중경임시정부를 향해 출발하게 된다. 필자주) 임천에 이르게 된다.

임천은 중국중앙군군관학교 분교가 있고, 이 분교에는 「한국광복군훈련반」(韓光班)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었다. 장준하가 여기 임천에 도착한 것은 1944년 9월 10일, 쓰까다를 탈출한지 66일만이었다. 장준하는 울고 또 울었다. 장준하를 울게한 것은 ‘이제는 살았다’ 해서가 아니었다. 중국중앙군군관학교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고난의 여정은 끝났다 해서도 아니었다. 거기 병설된 「한국광복군훈련반」이라는 벽판(壁板) 때문이었다.

한국광복군훈련반(韓國光復軍訓練班)!

장준하는 그것이 꿈인듯했다. 그 간판하나가 마치 광복된 조국이 선뜻 목전에 온 듯 느껴졌다. 아, 아, 아, 내가 여기에 있구나! 갈 길은 아직 인데, 임천이 바야흐로 중경인 듯 장준하를 감격으로 휘몰아 갔다.

장준하는 이 천혜의 때를 그저 지나칠 수는 없었다. 역사란 개인의 것이거나 단체의 것이거나 하늘의 것인지라 지극함 속에 보존하고 싶었다. <등불> 그것은 그래서 시작된 것이다.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의 작전에 살의(殺意)를 키우고 있을 때, 장준하는 광복군의 기(氣)를 키우는 ‘말씀’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이 「등불」이요. 「제단」이었다.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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