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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튼 손, 절망의 몸뚱이<흐물흐물하게 혹은 말랑말랑하게 교육하기>
김정원 | 승인 2016.11.07 11:17

공짜로 괜찮은 갤러리를 돌아볼 때면 ‘영국 살이’의 빈궁함을 잠시 잊게 된다. 얼마 전 다시 방문했던 런던의 사치 갤러리(Saatchi gallery)에는 팝아트가 즐비했다. 그 번쩍번쩍한 기상천외함에 기가 콱 눌리는 듯 하여 서둘러 옆 방으로 이동하였다. 방으로 들어서자 마자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던 한 작품, 어느 할머니의 초상화. 애써 이해하려 들던 팝아트 작품들과는 다르게, ‘할머니’는 찰나에 나의 눈시울을 적셨다. 

Jelena Bulajic, Grozda, 2014

그녀의 검버섯, 아로새겨진 주름, 세월 그득한 눈빛과 늘어진 살가죽까지. 그녀는 한꺼번에 나를 덮쳐왔다. 형형한 팝아트가 줄 수 없는 ‘얼굴’과 ‘살’의 무게감이었다. 여실히 미술작품이었지만, 나는 작품 속 할머니의 세월진 몸과 만나고 있었다. 그녀의 늘어진 살가죽에서 그녀의 역사를 상상하고, 갈라진 주름 사이에서 그녀의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몸은 내 의식보다 빠르게 나와 만나고 있었고, 나 역시 울컥하는 몸뚱이로 그녀를 경험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몸은 말이나 의식보다 빠르고 진실되게 사태를 드러내는데, 북의 동무를 만나던 그날도 그러했다. 금강산 관광이 가능했던 그 시절에(2004) 나는 운 좋게 북측의 대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남북 대학생 1차 상봉’이었기에, 서로에 대한 예상이 전혀 불가능하였다. 나와 함께 했던 동무들은 무용을 전공하는 여학우들이었다. 그들은 다소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고, 대화의 전반은 자신들의 풍요로운 삶을 선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눈에 착-하고 들어온 그녀들의 손. 어찌나 부르텄는지 그 색이 벌겋고 퍼렇고 하였다. 마디는 굵고, 손톱은 색이 바랬다. 당장에 내 핸드크림을 발라줄까 하다가, 그 마저도 실례가 될듯한- 그런 손이었다. 그러고 보니, 짙은 분가루 뒤에 숨겨져 있던 것도 아주 야윈 뺨이었다. 넉넉함과 풍요를 자랑하던 그네들의 이야기는 그녀들의 벌건 손과 대비되며 동시에 휘발 돼 버렸다. 그녀의 몸이 드러내고 있는 그녀의 세계가 그녀의 말을 삼켜버린 것이다. 

“몸은 사물이 아니라 상황이며, 세계에 대한 포착이며 자신의 기투를 윤곽 짓는다”는 보부아르의 말처럼, 낱낱이 부르튼 그 손이야말로 그네들이 처한 상황 자체와 존재 방식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그녀가 암만 말로 선전한들, 내가 경험한 것은 그녀의 몸이었고, 그녀가 드러내고 있는 것 역시 결국은 몸 그 이상이 아니었다. 순간 왈칵하여, 내 옆에서 걷고 있는 그녀를 아니 그녀의 부르튼 손을 덥석 잡고 싶었지만, 다만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그녀의 ‘말’ 때문이었기에 나는 그리하지 못했다. 그것이 동무된 심정으로의 배려였는지, 아니면 동정에 대한 스스로의 검열이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저 나는 눈으로 그녀를 만졌을 뿐이었다(메를로 퐁티). 박준상의 주장처럼 그네들의 손은 어쩔 수 없이 내게 내맡겨져 있었으므로. 

나의 몸은 공간에, 한 풍경에 하나의 사물에 직접적으로 열려 있으며, 그것들 모두는 나의 몸에 무매개적으로 침투하고, 그 몸과 ‘같이’ 존재한다. … 나의 몸은 마찬가지로 외부와 관계하지만, 타인에게 보여짐이 가장 핵심적인 존재방식이며, 그 타인에게 보여짐 자체는 타인에게 내맡겨짐과 다르지 않고, 그 내맡겨짐은 내가 어떠한 방식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탈존의 한 방식이다.

 – 박준상 ‘에로티시즘과 두 종류의 언어’

오늘의 이야기는 그래서 ‘부르튼 손’이다. 그 망가진 손, 몸, 그래서 아픈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의 ‘씨알’이다. 몸이 세계이고, 세계가 몸이라는 것을 가정했을 때, 우리의 상황은 보다 악하기에, 이제 말해져야 할 이야기는 더욱 잔혹하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몸뚱이가 그것이다. 영화는 잔혹하면서도 가슴 먹먹하게 몸을 다루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 전 열 개가 넘는 자격증을 취득한 수남(이정현)은 취업에 성공한다. 그러나 주판을 튕기던 그녀는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여 삶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게 되고, 열악한 노동조건의 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다행스러운 것은 (혹은 더욱 불행하게도) 맘도 다른 말로는 몸도 나눌 수 있는 한 남자를 만났다는 것이다. 남자는 프레스 기계를 다뤘다. 요란한 소리의 프레스 때문에 그의 청력은 거의 손실되었고, 결국 거금을 주고 보청기를 이식 받는다.

이 후 둘은 결혼하여 다시 행복을 꿈꾸지만, 수술은 신통치 않았다. 내장된 보청기는 남편이 작업을 하는 도중 이상을 일으켰고, 청력의 완전한 손실은 물론, 손가락 두 개가 잘리게 된다.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은 절단된 손가락 두 개를 화장지에 돌돌 감아 수남의 주머니에 넣어주지만, 수남은 알지 못했다. 봉합 수술을 한 남편을 이끌고 집 대문 앞에서 열쇠를 찾는 수남.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자 이내 잡히는 휴지 뭉텅이. 그 사이로 빠금 얼굴을 내미는 남편의 손가락 두 개. 잘려진 손가락을 바라보는 수남과 그의 남편의 아득한 표정 뒤로 잔혹한 현실이 오버랩 된다. 잘려진 손가락 속에 그들의 ‘지금’이 들어있다. 민둥민둥해진 그의 손 사이로 가난과 잔혹이 스민다.  

이제 수남은 죽자 사자 일터에 나간다. 혼자 벌어 남편도 먹이고, 집도 장만해야 했기에 건물 청소도 하고, 신문도 돌리고, 생선가게에도 나간다. 허리가 휘도록 성실한데 빚은 계속 불어난다. 대출을 받아 집을 장만하자, 또 빚이고 역시 빚이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2014

수남은 성실하게 일하여 돈을 모아 남편이 원하던 집을 장만하고, 다시 성실하게 일하며 그 빚을 까 나가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들의 ‘지금’은 거기에 있지 아니했다. 그들의 ‘지금’은 성실의 힘을 짓이기고 떠오른 가난과 빚 속에 쳐 박혀 있었다. 이러한 인식 이전에, 그러니까 그들의 상황 분석도 하기 아주 이전에 그들의 ‘지금’을 마땅히 폭로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네들의 몸뚱이, 수남과 남편의 손이었다. 

집인지 빚인지 모를 그 집에 들어가는 날, 마루에 수남과 남편이 나란히 앉았다. 다 부르튼 수남의 손을 남편의 민둥손이 위로한다. 성치 않은 손이 성치 않은 손을 만진다.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사태 그 자체’는 서로의 손과 손을 통해 만져지고 느껴진다. 딱딱하고 절단나고 부르튼 서로의 손이 만지고 만져진다. 서로를 감촉하며 스스로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감응을 느낀다. 서로를 만지며 서로의 존재의 처지를 느낀다. 느끼고 있음이 느껴진 것 속에 내재되어 있다. 성치 않은 손이 만져짐에 따라 그들의 아픈 존재가 드러나고 다시 드러난다. 그녀와 그의 몸뚱이와 그 몸뚱이가 “거주하는” 세계가 그간 어떻게 관계하며 살았는지가 서로에게 폭로된다. ‘만지고 만져지고 만져짐을 느끼며’ 그들은 서로에게 서로를 드러낸다. 

그 날 이후 남편은 자살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바싹 말라버린 아내의 몸뚱이에 따른 그의 응답은 자살이었다. 이마저도 순조롭지 못했고, 이제 그는 걷지도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한 채로 병상에 눕는다. 병원비는 이제 수남의 것이다. 부르튼 손도, 망가진 몸도 여전히 수남의 것이며, 남편의 병든 몸도 수남의 것이 되었다. 남편이 깨어나길 간절히 바라는 수남의 착한 마음이 잔혹한 현실 앞에서 빛을 잃는다. 수남을 관망하던 나의 머릿속엔 “일상의 좌절이 에로스를 상승시킨다”는 말만이 맴돌 뿐이다. 그들의 삶에 들어찬 잔혹이 수남의 사랑을 로맨스의 대열에서 정리해버린다. 누가 그들의 사랑을 욕망할까? 누가 그들의 부르트고 망가진 몸을 욕망할 수 있을까? 그 유명한 라깡의 주장처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가 우리일 때, 거의 전부가 욕망하지 않는 부르튼 그네들의 몸뚱이를 나 역시 욕망할 리 없다. 

타자의 욕망들에서 배제된 부르튼 몸뚱이에서 우리 사는 세계를 들여다본다. 세계 속에 던져져 있는 우리네의 몸 속에 세계가 배어있기 때문이다. 나와 - 세계가 얽히고 설키는 과정이 우리네의 몸에 구조화 되어있다. 환상도 가능성도 몸에서 현실화 되고, 몸에서 비껴나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외와 차별도 몸 구석 어딘가에 스며있고, 고된 노동과 자본의 칼 같은 질서도 깊게 배어있다. 권력의 횡포도 체제의 공포도 거기 어딘가에 멍울져 있다. 성실함을 배반하고, 로맨스를 거세한 슬픈 현실도 몸 어딘가에 새겨져 있다. 세계 속에 내팽개쳐져 있는 작은 몸뚱이들. 잔혹한 세계와 하나가 되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사느라’ 야위고 부르텄다. 잘린 손가락에, 야윈 뺨에 세상이 들어차 있다. 의식도 하기 전에 몸으로 부딪히며 만난 세계(preconscious), 몸으로 체험한 그 세계를, 그리고 그 세계를 감당했던 몸(들)을 가만 눈으로 만져보니, 울분과 허탈이 턱까지 찬다.   

울분과 허탈을 바로 보지 않고서 행복 너머의 환상과 소외 너머의 파랑새를 논할 수 없다. 진실은 영화보다 더욱 잔혹하다. 진실은 부르튼 손보다 더욱 망가져 있기에 다시 희망을 노래하기가 버겁다. 바닷물에 삭혀진 작은 몸뚱이들이 우리네의 ‘지금’이고, 국가 권력에 죽어 나간 몸뚱이들이 우리네의 ‘여기’이다. 자본의 칼부림에 고된 일상을 살아내는 그 몸뚱이들이 바로 우리의 ‘세계’ 그대로가 된다. 부르튼 손에서 부르튼 행복을 보고, 절단난 손가락에서 절단난 미래를 본다. 망가지고 아프고 짓무른 몸뚱이가 내가 ‘거주하는’ 그대로의 세계이다. 이제 부르튼 손에 꽉 쥐어진 절망을 서로가 머무는 세계로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외면도 말고, 과장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절망과 망가져버린 몸은 서로에게서 거듭 들추어져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그대의 절망을 내가 만집니다!’라고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 바로 그 부르튼 손에, 그 절망 속에 그분의 나라가 한恨으로 맺혀 있다.   

<필자 소개>

김정원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한 후,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 석사 졸업.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

 

김정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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