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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왕 ‘히스기야’를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이스라엘 역사 알기 ⒁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 승인 2020.12.17 17:08

히스기야에 관한 성경의 기록

‘히스기야’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열왕기하 18-20장」, 「역대하 29-32장」, 「이사야 36-39장」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므낫세’는, 그에 관한 「열왕기하」의 기록 18절 중에 오직 네 개의 절만이 그에 관한 정보를 주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반면에 ‘히스기야’에 관한 정보는 상당히 많이 나타납니다. 할애하고 있는 책의 분량도 많지만, 역사적인 서술로 보이는 내용이 상당히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므낫세’는 성경이 전해주는 정보가 너무 적어서 문제였다면, ‘히스기야’는 오히려 너무 많은 정보가 다른 나라의 비문들과 충돌하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먼저 성경에 ‘히스기야’에 관한 이야기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나열해 본 후에,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를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순서는 「열왕기하」와 「역대하」 배열을 섞어서 기록했습니다. 참고로 이웃 국가 왕의 이름과 함께 적힌 연도는 왕의 재위 기간입니다. 출생/사망 연도가 아닙니다.

⑴ ‘히스기야’는 ‘아하스’의 아들로, 25세에 왕이 되어 29년간 남왕국을 다스립니다(왕하18:1-2; 대하29:1).
⑵ ‘히스기야’가 왕이 된 때는 북왕국 ‘호세아’ 3년입니다(왕하18:1).
⑶ ‘히스기야’는 왕위에 오른 해에 성전을 보수하였고, 보수를 마친 후에 대대적인 제사를 드립니다(대하29:2-36)
⑷ ‘히스기야’는 유월절을 지킵니다(대하30:1-27).
⑸ ‘히스기야’는 우상을 철폐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계명을 지킵니다(왕하18:3-6; 대하31:1-21).
⑹ 북왕국은 ‘호세아’ 7년에 아시리아 ‘살만에셀(Shalmaneser Ⅴ, 주전 727-722년)’에 의해 포위되었다가, 3년 뒤인 ‘호세아’ 9년에 멸망합니다. 사마리아가 포위된 때는 남왕국 ‘히스기야’ 4년이고, 북왕국이 멸망한 때는 ‘히스기야’ 6년입니다(왕하18:9-10).
⑺ ‘히스기야’ 14년에 아시리아의 ‘산헤립(Sennacherib, 주전 705-681년)’이 남왕국에 쳐들어와 여러 성읍을 점령합니다. 「역대하」에는 이때의 연도가 나타나지 않습니다(왕하18:13-19:37; 대하32:1-23; 사36:1-37:38).
⑻ ‘산헤립’의 침공은 훗날 이집트 제25왕조의 파라오가 되는 ‘타하르가(Taharqa, 주전 690-664년)’와의 전쟁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왕하19:9; 사37:9).
⑼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아시리아 군대는 물러나게 되었고, ‘산헤립’은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돌아갔다가 암살당해 죽습니다(왕하19:35-37; 대하32:20-23; 사37:36-38).
⑽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 걸렸지만, 하나님께 기도하여 생명이 15년 연장됩니다(왕하20:1-11; 대하32:24; 사38:1-22).
⑾ ‘히스기야’는 자신의 병문안을 위해 바벨론의 ‘브로닥발라단(Marduk-apla-iddina II, 주전 722-710년, 703-702년)’이 보낸 사절을 맞이하여 남왕국의 모든 보물과 무기 등을 보여줍니다(왕하20:12-15; 대하32:31; 사39:1-8).

위에 나열된 항목들만 보아도 상당히 많은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북왕국의 ‘호세아’,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산헤립’, 이집트의 ‘타하르가’, 바벨론의 ‘브로닥발라단’, 이렇게 다섯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들에 관한 아시리아, 바벨론의 기록들과 비교하여 성경에 나타난 ‘히스기야’의 이야기를 정리해볼 것인데, 우선 성경 안에서 발생한 충돌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열왕기」에서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일으킨 왕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 ‘히스기야’와 ‘요시야’를 꼽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왕기하」에는 ‘히스기야’의 종교개혁 이야기가 생각보다 적게 나타납니다. 「열왕기하」만을 보자면, ‘히스기야’보다 성전에 바쳐지는 은에 관한 규정을 만든 ‘요아스’가 더 대단한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왕하12:2-16 참고).

우리가 ‘히스기야’를 종교개혁을 단행한 위대한 왕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아마도 「역대기」의 기록 때문일 것입니다. 「열왕기하 18장」은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을 단 네 줄로 설명하지만, 「역대하」는 두 장에 걸쳐 그 내용을 담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데, 「역대하 30장」은 ‘히스기야’가 유월절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이는 「열왕기」의 기록과 충돌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지만, 「열왕기하 23장 21-23절」은 사사시대 이후로 ‘요시야’가 처음 유월절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이는 평행본문인 「역대하 35장 18절」에도 나타나는데, 「역대기」는 여기에 한 문장을 첨가합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주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이라는 문장입니다. 이전 왕 중에도 유월절을 지킨 왕이 있었지만, ‘요시야’가 가장 대대적으로 유월절을 지켰다고 부연합니다.

「열왕기」와 「역대기」가 보이는 이런 차이는 두 역사가 집단 사이에 신앙적인 차이 또는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의 차이가 존재함을 알게 합니다. 이 차이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더 다뤄보려고 합니다. ‘히스기야’와 함께 ‘므낫세’와 ‘요시야’ 이야기 속에서도 「열왕기」 역사가가 침묵하고 있는 점들을 「역대기」 역사가는 대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에 관한 성경의 내용 중 충돌까지는 아니지만, 조금 이상한 부분도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25세에 왕위에 오릅니다. 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상한 점은 그의 아버지 ‘아하스’에 대한 기록에 있습니다. ‘아하스’는 20세에 왕이 되어 16년간 남왕국을 다스리고 죽습니다. 즉 35세나 36세에 죽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길게 36세로 생각하겠습니다.

‘아하스’가 죽은 나이가 36세이고, 당시 ‘히스기야’의 나이가 25세라면, ‘아하스’는 11세에 ‘히스기야’를 낳았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역대하 28장 5-15절」을 보면 ‘아하스’ 시대에 북왕국의 침공으로 인해 왕자 ‘마아세야’가 죽는 일도 발생했고, 수많은 남왕국 포로가 북왕국으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만약 11세에 낳은 아들이라면 장남일 가능성이 큰데, 이런 상황에서 장남이 살아남았거나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다는 점은 조금 이상해 보이긴 합니다. 이는 아마 역사가들이 어떤 숫자상의 오류를 인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기록하여 전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시리아 연대와의 비교 – 북왕국 멸망 시기

‘히스기야’가 유월절을 지켰는지 지키지 않았는지의 문제는 「열왕기」와 「역대기」 역사가의 관점 차이로 볼 수 있고, ‘아하스’가 ‘히스기야’를 몇 살에 낳았는지에 관한 문제는 작은 오류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아시리아 연대와 충돌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우선 북왕국 멸망이 언제였는가에 관한 문제부터 고민거리가 됩니다. 이는 ‘히스기야’에 관한 기록의 문제보다 아시리아 기록 자체가 충돌하는 부분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북왕국 ‘호세아’에 대해 다룰 때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열왕기하 18장 9절」은 아시리아 왕 ‘살만에셀’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였고 3년 뒤에 사마리아가 함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바벨론 연대기에는 ‘살만에셀Ⅴ세’에 대한 짧은 기록이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살만에셀Ⅴ세’가 사마리아를 폐허로 만들었다는 구절이 나타납니다. 이 기록은 ‘그래이슨(A. K. Grayson)’의 『Assyrian and Babylonian Chronicles』(이후 ABC, 『Anchor Bible Commentary』와 구분하기 위해 이탤릭으로 적습니다) 73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한 번역은 ‘그래비’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 231페이지에 있습니다. ‘살만에셀 Ⅴ세’가 사마리아를 함락시켰다고 말하는 때는 아마 주전 723년이나 722년으로 보입니다. 

▲ 사르곤 2세 코르사바드 비문 ⓒ위키미디어

그런데 ‘살만에셀 Ⅴ세’가 주전 722년에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사르곤 Ⅱ세(Sargon Ⅱ, 주전 721-705년)’는 자신이 사마리아를 함락시켰다고 말합니다. 위의 사진은 현재 미국 시카고 대학 오리엔탈 박물관(Oriental Institute Museum, University of Chicago)에 소장 중인 코르사바드 비문(Khorsabad Inscription)의 일부인데, 신을 위해 기록된 비문입니다.

사진 속에 있는 글귀의 내용은 아니지만, 코르사바드 유적에서 발견된 ‘사르곤 Ⅱ세’의 비문 중 상당히 길게 사마리아를 정복하였고, 그곳에 여러 나라의 사람을 정착시켰으며, 사마리아 성읍을 재건, 확장했다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이 내용은 ANET 284-285페이지에 나와 있으며, 번역된 내용은 ‘밀러/헤이스’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 421페이지에 있습니다.

아시리아 연대를 계산하는 학자들은 이 시기를 주전 720년으로 봅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북왕국 왕 ‘호세아’를 다룰 때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우선 「열왕기하 18장 9-10절」이 ‘살만에셀’에 의한 포위가 ‘히스기야’ 4년에 있었다고 말하고, 함락은 ‘히스기야’ 6년에 일어났다고 말하기 때문에 적당히 타협점을 찾아볼 수는 있을 듯합니다.

사마리아는 ‘살만에셀 Ⅴ세’에 의해 주전 722년에 포위되었고, 포위 직후 ‘살만에셀 Ⅴ세’는 죽습니다. 그 뒤를 이은 ‘사르곤 Ⅱ세’가 3년 뒤인 주전 720년에 사마리아를 함락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자면, ‘히스기야’ 4년이 주전 722년이기 때문에 ‘히스기야’의 즉위 연도는 주전 725년이 됩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므낫세’의 즉위 연도가 주전 695년이기 때문에 ‘히스기야’가 주전 696년에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대략 29-30년간 남왕국을 통치한 것이 됩니다. 그렇기에 「열왕기하 18장 1절」의 재위 기간도 약간의 오차는 있을 수 있지만, 맞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시리아 연대와 충돌 지점 – 산헤립 침공

북왕국 멸망 시점과 ‘히스기야’ 즉위 시점은 어느 정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히스기야’ 14년에 ‘산헤립’이 침공했다는 기록입니다. ‘히스기야’ 즉위 연도를 주전 725년으로 본다면, ‘히스기야’ 14년은 주전 712년입니다. 약간의 오차를 포함하여 주전 713-711년 사이가 됩니다.

위에 아시리아 왕의 재위 기간을 보신 분들은 이미 아셨겠지만, 주전 713-711년은 여전히 ‘사르곤 Ⅱ세’의 통치 기간입니다. ‘산헤립’은 아직 왕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왕기하 18장 13절」과 「이사야 36장 1절」이 왕을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사르곤Ⅱ세’의 침공이 있었던 것인데, 이를 ‘산헤립’으로 잘못 알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먼저 성경에서만 보더라도, 「역대하 32장 1절」은 ‘산헤립’이 침공해온 시점을 적지 않았습니다. 또 「역대하」와 「이사야」에 나타난 ‘산헤립’의 침공은 「열왕기하 18장 17절」 이하의 내용과 대응됩니다. 「역대하」와 「이사야」에 대응되지 않는 「열왕기하 18장 13-16절」은 ‘산헤립’의 침공과 전혀 다른 침공 내용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13-16절」은 하나의 침략 이야기로 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아시리아 왕이 침공하였고, ‘히스기야’가 성전과 왕국에 있는 은과 모든 금을 아시리아 왕에게 바쳤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17절 이후에 나타나는 침략 이야기는 「열왕기하 19장 35-37절」에서 ‘산헤립’의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히스기야’가 ‘산헤립’에게 공물을 바쳤다는 이야기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시리아 비문에는 ‘사르곤 Ⅱ세’가 남왕국을 침공했다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주전 713-711년에 남왕국과 연결된 사건이 나타나기는 합니다. 주전 713년경 아스돗의 왕 ‘아주리(Azuri)’는 아시리아에 대한 반란을 모의합니다. 이를 위해 당시 이집트 왕이었던 제25왕조의 ‘사바코(Shabaqo, 주전 716-702년)’에게 협력을 요청하기 위한 편지를 보냅니다. ‘사르곤Ⅱ세’는 이러한 정황을 파악하고, 주전 712년경 아스돗을 침략하여 파괴합니다.

▲ 사르곤 II세 각기둥 조각 ⓒ대영박물관

위의 사진은 현재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에 소장 중인 ‘사르곤 Ⅱ세’의 아스돗 침략 내용이 담긴 각기둥의 파편입니다. 니느웨에 있는 아시리아 궁전 도서관(Library of Ashurbanipal)에서 발견된 것으로 파편 조각만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파편에는 당시 아스돗에 협력하여 반란을 모의했던 나라의 명단이 나오는데, 블레셋, 유다, 에돔, 모압, 섬에 사는 나라들입니다. 비문의 내용은 ANET 287페이지에 나오며, 번역된 내용은 ‘밀러/헤이스’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 441페이지에 나옵니다.

이 각기둥의 내용에는 아스돗에 대한 정복 내용만이 나오기 때문에 남왕국은 ‘사르곤Ⅱ세’의 침략을 받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님루드(Nimrud)에서 발견된 비문에 적힌 짧은 문장에는 ‘먼 곳 유다 땅의 통치자 사르곤’이라는 수식어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히스기야’ 시절에는 이미 ‘사르곤 Ⅱ세’의 침략을 받았고 속국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비문의 내용은 ANET 287페이지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열왕기하 18장 13-16절」은 ‘사르곤 Ⅱ세’가 남왕국을 침략한 내용이고, 이후에 나타난 내용은 ‘산헤립’의 침공 내용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부족함이 있습니다. 실제 ‘사르곤 Ⅱ세’의 침략 기록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학자들은 이 연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산헤립’의 침공 연대가 ‘히스기야’ 14년이 아니라 ‘24년’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히스기야’의 연대는 잘못되었을 뿐이며, ‘사르곤Ⅱ세’의 침공이 아니라 ‘산헤립’의 침공이 두 번 있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들은 거의 다 반박되었습니다.

아시리아 학자들이 ‘산헤립’의 비문을 통해 파악한 남왕국 침공 연도는 ‘히스기야’ 25년인 주전 701년입니다. ‘사르곤 Ⅱ세’가 주전 705년 키메르족(Cimmerians)과의 전쟁에서 죽은 이후 아시리아 제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앞서 잠시 언급된 바벨론의 ‘브로닥발라단’이 주전 703년경에 다시 바벨론의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반란의 소요를 틈탔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록과 주전 701년이라는 연도는 ‘히스기야’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타하르가’와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집트학에서 ‘타하르가’가 이집트 역사에 등장한 시기를 아무리 빨라도 주전 700년을 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는 그가 제25왕조의 파라오가 된 주전 690년에 이집트에 등장했다고 봅니다.

‘산헤립’의 남왕국 침공이 이집트의 ‘타하르가’와 연관이 있다면(왕하19:9; 사37:9), 이 침공은 절대 주전 701년에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주전 701년 ‘산헤립’의 침공이 있었고, 이후 한 차례 더 침공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 주장은 여전히 증거가 부족하기에 주장에 힘이 실리진 않고 있지만, ‘산헤립’의 나머지 통치 기간인 주전 689-681년의 유적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절대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저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르곤 Ⅱ세’의 위협으로 인해 ‘히스기야’ 14년 또는 15년에 아시리아에 은과 금을 바친 사건이 있고, 이후 ‘히스기야’ 25년경에 주변국들의 대대적인 반란에 동참하여 아시리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산헤립’에 의해 침략당했다고 봅니다. 아시리아에 의한 두 번의 침공을 지지하지만, ‘산헤립’에 의한 두 번의 침공은 지지하지 않습니다. ‘타하르가’에 관한 언급은 후대에 첨가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만약 ‘산헤립’에 의한 두 번의 침공이 있었다고 본다면, ‘사르곤Ⅱ세’의 침공까지 ‘히스기야’ 시절에 세 번의 침공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브로닥발라단의 사절단

마지막으로 짧게 살펴볼 부분은 ‘히스기야’를 찾아온 사절단입니다. 「열왕기하 20장 12절」은 그 이름을 ‘브로닥발라단’이라고 적고 있고, 「이사야 39장 1절」은 ‘므로닥발라단’이라고 적고 있는데, 본래 이름이 ‘마르둑-아플라-이디나 Ⅱ세(Marduk-apla-iddina II)’인 점을 보았을 때, ‘므로닥발라단’이라고 적는 편이 옳을 것 같습니다.

‘므로닥발라단’은 주전 722년 바벨론의 왕위에 오릅니다. 이는 아마 ‘살만에셀 Ⅴ세’의 죽음을 틈타 바벨론 왕위에 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므로닥발라단’은 생각보다 오래 바벨론을 다스립니다. 약 13년간 바벨론의 왕으로 있다가 주전 710년 ‘사르곤 Ⅱ세’에 의해 쫓겨 엘람 지방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 므로닥발라단 ⓒ위키피디아

위의 사진은 현재 베를린 구 박물관(Altes museum, Berlin)에 소장중인 ‘므로닥발라단’의 부조입니다. 봉토를 수여하기 위한 조약을 맺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엘람 지방에 도망쳤던 ‘므로닥발라단’은 주전 705년 ‘사르곤 Ⅱ세’가 죽은 이후 바벨론 지역에 반란을 주동하여 동시다발적인 반란이 일어나게 만듭니다. 이런 반란 중에 바벨론의 귀족인 ‘마르둑-자키르-슈미 Ⅱ세(Marduk-zakir-shumi II)’가 주전 703년에 바벨론 왕위에 오르는데, ‘므로닥발라단’은 그를 밀어내고 자신이 다시 왕위에 올라 약 9개월간 다시 바벨론의 왕이 됩니다. 결국 ‘산헤립’에 패해 도망치다가 2년 후 죽음을 맞게 됩니다. 이에 관한 내용은 바벨론 연대기에 나옵니다(ABC 73-77페이지 참고).

만약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에게 사절을 보냈다면, 반란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려고 준비하던 주전 705년경이 가장 적합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히스기야’의 생명이 15년 연장되었다는 「열왕기하 20장 6절」의 기사와 맞지 않습니다. 바벨론의 사절이 조금 늦게 왔다고 해도 1,2년 정도의 차이여야 하는데, 병이 고쳐진 5년 뒤에 병문안을 왔다는 사실은 이상하게 보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 시점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15년 더 살게 되었고, 29년을 통치했기 때문에 ‘히스기야’ 14년 또는 15년에 병이 들었다고 봐야 합니다. ‘산헤립’ 침공이 있었다고 기록된 때와 같습니다.

이 시기는 대략 주전 710년경으로 ‘므로닥발라단’이 ‘사르곤 Ⅱ세’와 싸우던 때입니다. ‘므로닥발라단’이 남왕국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을 가능성은 있지만, 「열왕기하」에 나타난 분위기는 그런 긴급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약간 여유 있는 시기에 군사 동맹을 맺기 위한 사절로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히스기야’에 관한 기록은 너무 친절하게 연도가 적혀 있다보니 오히려 아시리아, 바벨론의 기록과 충돌합니다. ‘히스기야’와 관련된 숫자(나이, 연도)가 대부분 충돌하고 있기 때문에 ‘히스기야’ 통치 기간에 나타난 몇 가지 연대는 분명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전체적인 통치 기간은 수정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오늘 글에서는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왕 ‘히스기야’에 관한 내용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히스기야’에 관한 기록이 왜 차이가 나는지, 역사가 집단들은 무엇을 전하고 싶었는지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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