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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새로운 노동교회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었죠”이철우 목사, 노동자들과 광주기노련의 곁을 지켰다 ⑴
권이민수 | 승인 2021.02.15 15:57
▲ 군사독재정권 시대 치열했던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한 가운데에서 노동자들의 곁을 지켰던 이철우 목사. 지금은 5.18기념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권이민수
80년대 민주화를 향한 치열한 투쟁 속에 함께했던 기독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바로 기독인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만든 단체인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이하 기노련)이다. 그러나 기노련은 다른 단체에 비해 많은 이들에게 낯설기만 한 이름이다. 그래서 에큐메니안은 기노련의 활동을 조명하고 당시의 상황을 독자들에게 전해보고자 기노련에서 활동했던 민주화 투쟁의 선배들을 찾았다. 먼저 만난 인물들은 전국 기노련 창립에 큰 역할을 했던 3인방 유동우 소장(관련 기사: 「유동우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초대 회장을 만나다」, 첫 번째 기사, 두 번째 기사), 신철영 선생(관련 기사: 「기노련 탄생의 산파, 신철영 선생」, 첫 번째 기사, 두 번째 기사), 한명희 선생(관련 기사: 「한명희 기노련 초대 사무총장을 만나다」, 첫 번째 기사, 두 번째 기사)이었다. 이들은 기노련 탄생의 역사와 기노련 활동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기노련은 서울권에서만 활발하게 활동했던 것은 아니다. 기노련은 광주, 인천 등 여러 지역에서도 그 역할을 톡톡히 하며 노동자의 그늘이 됐다. 김상집 선생(「김상집, 광주기노련의 산증인」. 첫 번째 기사, 두 번째 기사)은 광주기노련의 탄생과 활동, 그 마무리 과정에 있던 다양한 이야기를 단숨에 풀어내기도 했다.

기노련이 노동자 중심의 단체였지만, 기독교 정신을 표방했기에 기노련 곁에는 목회자와 교회가 있었다. 기노련 노동자들은 교회가 가진 자원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그들의 투쟁을 이어갔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 노동운동을 향한 집요한 탄압 속에서도 기노련이 대중 집회와 갖가지 파업과 시위를 지속할 수 있던 것도 그런 점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기노련은 때로 목회자, 교회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기노련과 교회, 그 사이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광주기노련이 활발히 활동하던 80년대 중후반, 그들과 함께 했던 교회가 있었다. 바로 광주 무등교회였다. 이철우 목사는 그 무등교회에서 목회하며 광주기노련을 지원했다. 이 목사의 이야기가 궁금해 지난 1월 26일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이 담긴 5.18민주화운동기념관을 찾았다. 현재 이철우 목사는 5.18기념재단 이사장으로 여전히 민중과 함께 숨 쉬고 있었다.

▲ 독자님들께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철우 목사입니다. 저는 1970년대 유신 때 기장청년회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두 차례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됐다가 박정희가 죽고 난 다음에야 출소하기도 했어요. 저는 원래 목포 죽동교회 교육전도사로 있었는데 광주 지역의 원로 분들이 “광주로 올라와서 기독교 운동에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광주로 올라오게 됐습니다. 광주에 와서는 기청 전남연합회 상임총무와 엠네스티 전남지부 간사를 했습니다. 그게 1980년이었습니다.

그러다 5월 80년 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목격하면서 새롭게 결단해야겠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차에 산업선교위원으로부터 노동교회를 하자는 제안을 받게 됐습니다. 그래서 1980년 10월부터 무등교회를 하게 됐습니다.

무등교회는 전남지역에서 산업선교를 담당하던 교회였습니다. 노동자 몇 사람들과 함께 시작했었습니다. 마치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성문밖교회처럼요. 그렇게 목회활동을 광주에서 시작해서 후엔 목사도 됐습니다. 무등교회는 3년 전에 은퇴를 하고 현재는 5.18기념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 광주 무등교회는 어떤 교회였는지 더 구체적으로 들어볼 수 있을까요?

산업선교는 원래 현장에 들어가서 하는 것입니다. 사업장에서 성경공부를 한다든지 노동자들과 함께 의식화 활동을 한다든지요. 그런데 80년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산업선교를 할 수 없게 만들었어요. 산업선교를 향한 탄압이 심하고 조직도 다 드러나고요. 그래서 산업선교 전략을 바꾸자는 말이 나왔어요. 교회라고 하는 공간을 노동교회로 바꾸고 산업선교를 할 수 있는 베이스캠프를 만들자는 것이었죠. 그렇게 해서 시작된 교회가 서울 성수동의 ‘성수교회’, 부산의 ‘우리교회’, 광주의 ‘무등교회’ 등이었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그 지역의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공간이 됐습니다. 다른 교회들처럼 똑같이 예배를 드리는 등의 평범한 그런 활동을 하지만 동시에 교회에서 야학도 하고 노동자 의식화를 하는 성경공부도 하고 노동자들의 인권침해가 있다든지 하면 지원하는 활동도 하면서요.

무등교회는 그런 활동을 쭉 해왔는데 1990년도 6월 항쟁 이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제도적인 민주화 활동이 됐습니다. 그 후 노동자들은 노동자대로 전노협이라든지 대중조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노동자가 자기 대중조직을 가지게 되면서 무등교회 안에서 함께 했던 노동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니 목사인 저는 새로운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물론 노동자들은 저보고 “목사님 현장에 들어가서 같이 노동운동 합시다” 하기도 했죠.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개척교회를 또 시작했죠. 그게 1993년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은 항상 현장이었으니깐 이주노동자 문제에 눈이 가더라고요. 그래서 1996년부터 광주외국인노동자센터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벌써 25년째에요. 형식적으로는 아직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후임자는 서울강남향린교회에서 목회하던 이병일 목사가 맡게 됐고요.

▲ 목사님께서 기억하시는 기노련은 어떤 단체였나요?

저는 노동운동보다는 노동선교라는 차원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특별히 기노련과 관련을 갖게 된 것은 그 전에 무등교회를 시작할 때였지요. 제가 전에 목포에서 교육전도사로 있을 때는 아직 신학대학교를 마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무등교회에서 한 2년 정도 목회하다가 82년도에 한신대학교를 가서 신학공부를 하고 86년에 졸업했죠. 졸업 당시에는 정동용 목사라는 다른 분이 무등교회를 맡고 있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갈 때에는 노동에 관심이 없는 분이 무등교회에 오셨었습니다. 그 분이랑 교회 중심을 이루는 노동자들 하고 갈등이 엄청나게 심해졌었죠. 그 바람에 교회 내분도 일어났습니다. 결국 그 분은 다른 교회를 개척하며 나가시고 후임자로 산업선교를 훈련받은 정동용 목사가 오게 됐던 거죠.

제가 한신대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많이 고민했었습니다. 저는 기성교회 목회자로 일할 생각이 없었거든요. 그러다 YMCA 총무 자리가 비었다고 그 자리를 지원해보라고 선배로부터 연락을 받게 됐습니다. 목포 YMCA였고 제 고향이었기 때문에 지원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고향이라 저를 잘 알기도 하고 목포 YMCA가 좀 보수적이라서 70년대에 긴급조치9호로 2번이나 감옥에 다녀온 경력이 있는 운동권은 안 된다는 답변이 왔습니다. 결국 떨어졌죠.

전태일의 일기에 “노동자들의 곁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도 전태일처럼 80년도 5월의 광주가 뇌리에 계속 남아있어서 고민이 계속 됐습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졸업했으니 어찌됐든 목회를 해야 되는 상황이었죠. 끊임없이 광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저를 재촉하니 결국 86년 하반기부터 혼자 광주로 내려가게 됐습니다. 당시 결혼한 상태였는데도요.

그렇게 하남공단에 들어가 노동을 했습니다. 무등교회는 이미 누군가 있으니 저는 새로운 노동교회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러기 위해서 비록 노동자가 될 수 없어도 어느 정도 노동자의 삶을 체험하자는 맘이었습니다. 1년 정도 하남공단 근처에 방을 얻어서 노동을 했습니다. 무등교회에서 알게 된 구두닦이 청년이 있었는데 그와 함께 방을 얻었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밥을 해 도시락을 싸서 저는 하남공단에 가고 그 친구는 광주 시내로 나와 구두닦이를 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무등교회로 오게 됐어요. 정동용 목사가 노동교회 목회자인데도 기노련 노동자들과 부딪혀서요. 그런데 그렇게 갈등이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제가 경험을 해보니깐요. 노동교회를 해보니 갈등이 심합니다. 어쨌든 목사는 교회 중심으로 노동 선교를 하고 싶어 하고, 기노련은 노동운동 중심으로 하려고 하니까요. 어쨌든 서로 좀 연결을 잘 시키면 될 텐데 그게 잘 안됐던 듯합니다.

교단에서 노동선교 책임을 맡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이 그 분들에게 계속 정동용 목사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나 봐요. 그런데 마침 제가 노동현장 체험을 마치고 노동교회를 준비하고 있던 시기여서 그 분들이 저를 다시 무등교회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정동용 목사를 다른 교회로 보내고 저를 보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한 교회에 두 목사가 있는 셈이었죠. 그래서 참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정동용 목사가 제 후배였는데 그래서 오해가 더 깊어졌죠.

결국 정동용 목사는 기존 목회로 가셨습니다. 둘 역할이 참 애매했어요. 기노련은 저를 환영하고 서로 활발하게 활동하게 돼서 교회 내 정동용 목사의 입지가 곤란해졌습니다. 그래서 정동용 목사는 노동상담소의 소장을 맡고 제가 무등교회를 총괄하게 됐죠. 근데 노동상담소를 차려도 잘 안됐어요. 정동용 목사가 목사다보니 설교를 하고 싶어 하기도 했고요. 저도 기노련과 88년부터 3-4년간 활동을 같이 했는데 기노련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납했습니다. 기노련이 노동운동 중심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문제 삼지는 않았습니다. 교회 내 규범적으로 있는 세례나 예배 등은 꼭 좀 참여해라 정도였죠.

그러나 어렵긴 했죠. 당시 기노련은 광주지역 노동운동의 주요 세력 중 하나인 PD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노동운동으로 막 갔죠. 저는 어떻게든 기노련을 노동교회, 민중교회 활동으로 그 내용을 채우려고 했고요. 그런데 아무래도 잘 안됐습니다. 결국 그렇게 돼서 크게 부딪히지는 않아도 갈등은 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다 감싸 안았어요. 당시 워낙 탄압이 심해 노동운동이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교회는 기노련과 함께했습니다. 기노련 전부는 아니어도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교회 집사도 되고 민중교회운동연합이라는 모임에 참여도 하고 했어요. 

▲ 목사님께서 노동운동과 노동선교를 구별하고 계신데 그 차이는 뭘까요?

그냥 노동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신앙에 토대를 둔 운동이라기보다 일반적인 노동운동을 이야기하겠죠. 그러나 노동선교라면 기독교 노동운동입니다. 기독성을 바탕으로 한 노동운동이죠. 물론 기노련은 스스로 기독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긴 했지만 기독성은 기본적으로 예배와 같은 것을 통해야겠죠. 물론 교회를 통하지 않아도 기독성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도 제가 목사다 보니 교회에 기반을 둔 운동을 바랐던 거 같습니다.

▲ 기노련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저는 기노련처럼 투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목사였니까요. 제가 노동선교를 한다고 해도 제가 할 수 잇는 역할은 현장에 나가 노조를 설립하고 투쟁하고 하는 것은 아니었고 노동자를 지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잘 못할 때 상담하고 지원했죠.

예를 좀 들어볼까요? 80년대 5월 진상규명 투쟁이 활발히 일어났을 때 기노련도 함께했습니다. 당시 4월만 되면 5월 투쟁이 시작됐거든요. 광주 지역의 학생운동이 치열하게 조직됐습니다.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5월 투쟁을 조직했고요. 역시 기노련이 그쪽에서 열심히 활동했죠. 기노련 멤버들은 퇴근을 교회로 했어요. 교회에서 라면을 끓여먹었죠. 화장실 옆 창고에는 쇠파이프를 신문지로 싸서 쌓아놓았고요.(웃음) 라면 먹고 그 쇠파이프 들고 나가서 새벽까지 싸우는 거예요. 학생운동도 마찬가지였고요. 거의 매년 그랬습니다. 한번은 기노련 한명이 유인물을 뿌리다가 파출소에 걸렸어요. 그게 새벽 1시였는데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어요. 우리 교회 교인이라고요. 그래서 밤중에 나가서 데리고 나왔었어요.

또 한 번은 치열하게 투쟁하다가 전투경찰들이 던진 돌에 노동자 한명이 다리가 부러지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이런 식으로 사건이 터지면 제가 사건을 수습하고 지원하고 개인 상담해주고 했거든요. 그 노동자는 기독병원에 한 달간 입원했죠. 그러다 퇴원을 하게 됐는데 돈이 필요했어요. 당시 저도 돈이 없었거든요. 돈을 계산해야지 퇴원이 가능했는데 큰일이었죠. 그 때 병원에 아는 의사가 있어서 그에게 상담을 했어요. 그 의사가 “목사님 그냥 데리고 나가보세요”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데리고 나와서 퇴원했어요. 그런데 제가 그 입원비를 보증섰던 거라 그 후 10년 동안 돈 갚으라고 연락이 오기도 했었습니다. 제가 하던 일은 그런 것이었죠. 주일날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상담도 해주고 전체 운영과 방향을 의논하기도 하고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우리데이타’라는 초기컴퓨터 회사가 있었는데 여성노동자들이 한 50명 정도 일했습니다. 그런데 사업주가 그냥 폐업해 버린 거예요. 그래서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투쟁이 있으면 저는 현장에 그냥 함께 있었죠. 그런데 당시 ‘시작투’라는 한 단체의 멤버가 유인물을 뿌리겠다고 옥상에 올라갔다가 고압선에 닿아서 떨어졌습니다. 다행히 옥상 쪽으로 떨어져서 살았죠. 그런 일이 있으면 다 저한테 와요. 그래서 그 사람을 데리고 근처 병원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큰 병원에 가라고 하더라고요. 결국 전남대병원에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못 살린다는 거예요. 몇 만 볼트가 흘러서 엄지발가락이 익어버렸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의사한테 “인간의 생명은 의사라고 해도 맘대로 못하고 신에게 달려있으니 최선을 다해봅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입원시키라고 하더라고요.

당시 입원을 위해서는 20만 원정도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저한테 돈이 있어야지요. 그때 마침 YWCA에 김영진 국회위원이라고 같이 기청활동 했던 사람이 와서 보고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어서 가서 보고회 보고 “국회위원이 노동자 현장을 봐야 한다”고 김영진 위원을 현장에 데리고 와서 “돈 좀 있으면 빌려주라”(웃음)고 했어요. 그 돈으로 다행히 입원시킬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결국 살아났어요. 발가락만 익어서 그 부분만 수술했죠. 나중에 그 사람이 퇴원한 다음에 교회를 찾아왔더라고요. 목사님 고맙다고 돈을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나는 그건 못 받고 헌금하시오” 했습니다. 이런 일은 정말 수두룩했죠.

이철우 목사는 차분히 그간의 경험을 풀어냈다. 노동자와 함께 한 시간들은 때로 어렵고 힘든 시간이었을지 모르나 그의 표정에는 그 시절에 대한 자부심과 기쁨이 묻어났다. 든든한 목사가 곁에 있었기에 광주기노련은 더욱 맘껏 투쟁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노동을 천시하고 노동운동을 죄악시하는 작금의 교회가 본받아야할 모습이다. 

다음 기사에서는 광주기노련과 함께한 이철우 목사의 또 다른 이야기들이 담길 예정이다.

권이민수  simin004@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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