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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piety)이란 무엇인가?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㊶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21.11.23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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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정에는 ‘학문과 경건’이라는 글이 새겨진 큰 돌이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정에는 ‘경건과 학문’이라고 새겨진 돌이 세워져 있지요. 학문의 자유와 반교권주의적 진보신학을 추구한 기장과 학문보다 종교적 교리를 지키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둔 보수신학을 추구한 예장 통합, 그리고 한신대와 장신대, 두 신학대학의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처럼, 장로교 분열의 역사는 해방 후, 신사참배를 둘러싼 갈등에서 195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측을 축출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던 지도자들이 해방 후, 신사참배한 지도자들의 회개를 주장했다가, 오히려 축출당하면서, 생겨난 교단입니다. 고신은 지금까지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칼뱅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신학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후, 한국의 장로교는 학문적 양심의 자유를 주장하고,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인 김재준 목사(1901-1987)를 제명하고, 학문적 양심의 자유를 주장한 신학교수들과 교역자들이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대구 총회에서 축출당하면서 다시 분열되었지요. 기장과 예장 통합의 분열 원인은 주로 학문의 자유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신에는 ‘학문과 경건’이, 장신에는 ‘경건과 학문’을 새긴 돌이 두 캠퍼스에 서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 ‘학문과 경건’은 서로 상충되는 것도 아니고, 또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학문적 자유를 인정하고 추구한다고 해서 경건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모두 학문적 탐구와 학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배움에 치열한 사람은 믿음에서도 치열하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압니다.

신학, 곧 ‘하나님 배우기’는 온 몸으로 하는 것이지, 단지 머리, 단지 가슴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 곧 ‘하나님에게 말 걸기’, 또는 ‘하나님의 말씀 듣기’는 은혜 아니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며, 하나님은 믿기 위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서 믿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학문과 경건은 나눌 수는 있지만, 둘은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분리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한 편에는 지나친 자유주의가, 다른 한 편에는 지나친 근본주의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마치 믿는 일은 가슴과 관계되고, 아는 일은 머리와 관계되며, 공연히 머리만 크면 신앙생활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신학 때문에 교회성장이 안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 없는 신앙’은 자칫 반지성주의, 눈먼 열광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신앙 없는 신학’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없는 신학’은 능력 없는 지식에 불과합니다. 그런 신학은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수의 한국교회가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고 학문을 경시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알아야 바로 믿고, 바로 믿으면 바로 알게 되어 있습니다. 알기만 하고 믿지 않으면 지식은 있을지 몰라도 실천이 없고, 믿기만 하고 알지 못하면 그런 믿음은 쉽게 흔들립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된 사람이 진정으로 성숙한 신앙인이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이른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엡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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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piety)의 사전적 의미는 “종교적 헌신이나 영성을 포함한 미덕”인데, 원래 그리스적 사고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경건’(euvsevbeia, 유세베이아)이란 “선하고 명예로운 시민생활의 이상을 예증해주는 덕목”이었습니다. ‘유세베이아’(euvsevbeia)는 ‘좋은’이라는 뜻의 단어 ‘유브’(euv)와 ‘존경하다’는 뜻의 ‘세베이아’(sevbeia)라는 단어가 합성된 말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경건’이라는 말은 “존경을 받을 만한 좋은 행위”라는 것이지요.

구약성경에서 ‘경건’에 해당하는 단어를 찾는다면, ‘하시드’라는 단어가 가장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혹은 경외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하시드’는 원래 “헤세드를 실천하는 사람”을 뜻해, 경건이 처음부터 실천과 관계된 것임을 드러내줍니다.

그러나 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관계에서 드러나는 도덕적 태도도 경건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은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다하며, 신실하고, 진실한 사람(시편 12,1; 미가서 7,2)을 의미하지요.

▲ Nicolas Guy Brenet French 「Piety and Generosity of Roman Women」 (1785) ⓒWikimedia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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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에게 경건한 사람은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유대 백성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며,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행 10,2)을 의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헬라적 생활 덕목을 받아들여 자신의 서신에서 ‘유세베이아’를 언급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경건한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던 경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신앙생활에 대해서 훈계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도덕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서 경건을 단순히 내면적인 신앙 상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신앙 실천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저자도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약 1,26-27).

그러나 경건은 훈련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디모데 전서의 저자는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서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준다”(딤전 4,7-8)고 말했지만, 저는 몸의 훈련도 중요하고, 약간의 유익이 아니라, 참으로 많은 유익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 성경을 읽고 쓰고 암송하는 일, 금식과 단식, 구제와 헌금도 다 몸의 훈련입니다. 훈련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유대인은 하루에 세 번, 무슬림은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합니다. 그 외에도 엄격하게 그들 나름대로 지키는 율법과 규례들이 있지요. 이것이 율법주의나 형식주의로 끝나는 것은 물론 문제가 됩니다. 게다가 그런 것들이 꾸며낸 것들이라면 더 문제가 되지요. 그래서 골로새서 저자는 그런 규정과 교훈들이 “꾸며낸 경건과 겸손과 몸을 학대하는 데는 지혜를 나타내 보이지만,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는 데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골 2,23)고 말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진정한 경건은 형식과 내용, 드러난 행위와 마음의 생각이 일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욕망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되어,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하는 것이어야 합니다(딤전 4,7-8; 6,6).

그래서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지만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하는 사람을 멀리하고(딤후 3,5),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딤전 6,11) 권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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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상이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는 이유는 많습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을 상실했기 때문이지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 곧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는 능력,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경건은 신앙의 내면화, 개인의 종교적 실천, 도덕적 선행으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경건,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훈련된 욕망 절제의 능력은, 이웃과 창조 세계에 대한 사회적 책임성과 신앙의 공공성을 오히려 더 강화할 것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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