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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 역사와 역사가의 역사이스라엘 역사 알기 ㉒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 승인 2021.02.11 16:58

아람과 북왕국 역사 정리

지난 글에서 북왕국 ‘여로보암 2세’ 시기는 북왕국의 마지막 전성기였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북왕국의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아버지 ‘요아스(주전 800-785년)’가 영토 확장의 기반을 닦아 놓았던 탓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아시리아의 ‘아다드 니라리 3세(주전 810-783년)’가 아람을 정복했기 때문입니다.

아람과 남북왕국의 대치는 열왕기에서 종종 나타납니다. 남왕국 ‘아사’와 북왕국 ‘바아사’ 시절 아람의 침략이 있었고(왕상15:18-20), ‘아합’ 통치 시절에도 아람과의 전투가 나타납니다(왕상20:1-34). 남왕국 ‘요아스’ 때에 아람은 남왕국을 침공하기도 합니다(왕하12:17-18).

그리고 오늘 저희가 살펴보려고 하는 북왕국 ‘여호아하스’와 ‘요아스’ 시절에도 아람과의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후에 나타나는 아람왕 ‘르신’과 북왕국 ‘베가’의 시리아-팔레스타인 동맹에 대해서는 이미 「이스라엘 역사 알기(19) ‘이스라엘 열왕의 공백기’」에서 다루었습니다.

아시리아 ‘살만에셀 3세(주전 858-824년)’의 시리아-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서방 원정(주전 841년, 838년) 이후 아시리아는 내부 반란을 잠식시키기 위해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전 838년 이후 아시리아 왕 ‘샴시 아다드 5세(주전 823-811년)’ 통치 시기에는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침공이 없었습니다.

이 시기는 ‘살만에셀 3세’의 서방 원정 이후 발톱을 숨기고 있던 아람의 ‘하사엘’에게는 최상의 시기였습니다. 이후 ‘아다드 니라리 3세’의 원정이 있을 때까지(주전 805년) 약 34년간 아람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침공하며 자신의 영토를 확장합니다.

「열왕기하」에는 열왕기 역사가 집단의 일반적 역사 서술과 함께 ‘엘리사’ 전승이 섞여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시대적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우선 이 부분을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 북왕국 ‘아합’을 다룰 때에도 언급하게 되겠지만, ‘아합’은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반아시리아 동맹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아람과 동맹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런 관계는 「열왕기상 20장」에 나타난 ‘아합’과 아람 왕 ‘벤하닷’의 전쟁 이야기에서도 드러납니다(왕하20:31-34절 참고. ‘아합’은 ‘벤하닷’을 형제라 부르며 그를 살려줍니다).

그렇기에 「열왕기상 20장」에 나타난 아람과 북왕국의 전쟁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도, 「열왕기상 22장 29-40절」에 나타난, ‘아합’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아람과의 전쟁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 북왕국 ‘여호람’ 통치 기간에 발생한 일처럼 보이는 ‘엘리사’가 아람의 장관 ‘나아만’을 치유한 사건(왕하5:1-27)과 그 직후에 이어지는 아람 왕 ‘벤하닷’의 북왕국 침공 사건(왕하6:8-33)은 조금 이상해 보입니다. 분명 북왕국 ‘여호람’도 자신의 할아버지 ‘아합’과 마찬가지로 반아시리아, 시리아-팔레스타인 동맹 구도를 따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맹 중에 전쟁을 치뤘다는 상황과 함께 「열왕기」에는 ‘벤하닷’이라는 이름이 너무 광범위하게 나타납니다. 「열왕기상 15장」에서 북왕국 ‘바아사’와 남왕국 ‘아사’ 시절 침략해온 왕의 이름이 ‘벤하닷’이었습니다. 「열왕기상 20장」에서 ‘아합’과 전쟁한 왕도 ‘벤하닷’입니다. ‘엘리사’에게 신탁을 받은 ‘하사엘’이 죽인 왕도 ‘벤하닷’입니다. 또 ‘하사엘’의 아들도 ‘벤하닷’입니다.

▲ 멜카르트 석비 ⓒ위키피디아

위의 사진은 시리아 알레포(Aleppo)에서 몇 Km 떨어진 위치에서 발견된 석비로, 아람왕 ‘벤하닷’이 페니키아 신 멜카르트에게 바치는 서원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멜카르트 석비(Melqart stele)’라고 불리는데, 현재 알레포 국립 미술관(National Museum of Aleppo)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벤하닷(Ben-Hadad)’이 아람의 왕을 부르는 일반적 호칭이 아니라 인명이기 때문에 과거의 학자들은 다양한 해석을 내렸습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해석한 존 브라이트(John Bright)나 앤드류 디어맨(J. Andrew Dearman)은 아람에 ‘벤하닷 1세’부터 ‘벤하닷 4세’까지 네 명의 ‘벤하닷’이 존재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네 명의 ‘벤하닷’이라는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인해 ‘하사엘’ 전의 ‘벤하닷 1세’와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 2세’가 있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인터넷 위키피디아(Wikipedia)에서 검색해보면, 이 이론에 따라 두 명의 ‘벤하닷’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아람 왕의 아들 다메섹 사람 에셀의 아들 빌-하닷이 그의 주 멜카르트에게 세운 비석. 빌-하닷은 멜카르트에게 절하고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최근의 학자들은 ‘벤하닷’은 ‘하사엘’의 아들 한 명이고, ‘예후’ 왕조 이후의 내용이 ‘아합’ 시대에까지 편입되어 나타난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아합’ 때의 아람 왕은 ‘하닷에셀(Hadadezer)’이기 때문입니다.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왜 이런 구도를 만들어 놓았는지에 대해서는 ‘아합’과 ‘엘리사’에 관해 다룰 때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아람 왕 ‘하사엘’의 북왕국 침공에 관해서는 「열왕기하 10장 32-33절」의 기록이 신빙성 있어 보입니다. 북왕국 ‘예후’ 통치 시기에 아람의 침공이 시작되었다는 언급입니다. 아람 왕 ‘하사엘’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침공은 북왕국 ‘예후’와 ‘여호아하스’ 시절에 집중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아람의 침공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전 805년에 있었던 아시리아 ‘아다드 니라리 3세’의 원정으로 인해 중단됩니다. ‘아다드 니라리 3세’의 원정 기록은 지난 글 「이스라엘 역사 알기(21) ‘역사가와 예언가의 차이’」에 알-리마(Al-Rimah) 석비 사진과 함께 적었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아다드 니라리 3세’의 원정 때 아람의 왕은 ‘하사엘’이 아니라 그의 아들 ‘벤하닷’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다드 니라리 3세’의 원정은 주전 805-803년에 있었고, 주전 796년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아다드 니라리 3세’의 805년 원정에서 ‘벤하닷’이 아시리아에 완전히 항복했다면, 아람의 북왕국 침공은 북왕국 왕 ‘요아스’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끝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전 796년 아시리아의 재원정 때 아람이 완전히 함락되었다고 본다면, 북왕국 ‘요아스’ 즉위 직후에 작은 침공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아람에 관해서는 이후에도 언급하게 될 듯하지만, 이 정도만 살펴봐도 괜찮을 듯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살펴보자면, 조용했던 아시리아가 갑작스럽게 서방 원정을 결정하게 된 계기입니다. 

▲ 자쿠르 석비 ⓒ위키피디아

위의 사진은 하맛(Hamath) 왕 ‘자쿠르’가 ‘하사엘’의 아들 ‘바르하닷(Bar-Hadad, 벤하닷)’의 침공을 막은 후 세운 비문으로 ‘자쿠르 비문(Stele of Zakkur)’으로 불립니다. ‘자쿠르’가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사길’이라고 번역되었기 때문에 ‘사길 비문’으로도 불립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비문의 내용을 일부 살펴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원문은 ANET 655-56페이지에 있으며, 번역은 ‘밀러/헤이스’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 372페이지를 따릅니다.

“아람 왕, 하사엘의 아들, 바르하닷은 나를 치기 위하여 열[중에 일곱] 왕을 모았다. 바르하닷과 그의 군대; 바르구시와 그의 군대; 길리기아 왕과 그의 군대; 움크 왕과 그의 군대; 구르굼 왕과 그의 군대; 삼알 왕과 그의 군대; 밀리드 왕과 그의 군대. [바르하닷이 나를 치기 위하여 모은 이 모든 왕들은] 일곱 왕과 그 군대들이었다.”

아람 왕 ‘벤하닷’ 연합군의 하맛 침공은 하맛 왕 ‘자쿠르’에 의해 실패로 돌아갑니다. ‘밀러/헤이스’는 이 비문의 내용을 아람 왕 ‘벤하닷’의 군사력이 약화되었다는 증거로 활용합니다. ‘그래비’의 경우에는 ‘벤하닷’ 연합군의 목표는 하맛이 아니라 아시리아였고, 이런 연합군의 움직임은 아시리아 왕 ‘아다드 니라리 3세’가 서방 원정을 단행할 수밖에 없도록 이끌었다고 해석합니다.

저는 아람 왕 ‘벤하닷’의 무리한 영토 확장 정책과 반아시리아 동맹 체결이 결국 아시리아를 움직이게 만들었다고 봅니다. 어쩌면 하맛 왕 ‘자쿠르’가 ‘벤하닷’ 연합군을 막을 수 있던 데에도 아시리아의 도움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기록한 어떤 역사적 증거도 없기 때문에 상상일 뿐입니다.

구원자 엘리사, 하나님의 섭리

저희가 오늘 다루려 하는 북왕국 ‘여호아하스’와 ‘요아스’는 너무나 작은 정보만을 가진 왕들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크게 다룰 수 있는 내용이 없습니다. 다만 이들에 대한 「열왕기하 13장」의 정보는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여호아하스’는 북왕국을 17년간 다스렸고, ‘요아스’는 16년간 다스렸습니다. 따라서 ‘여호아하스’의 재위 기간은 주전 816-800년이고 ‘요아스’의 재위 기간은 주전 800-785년입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두 왕의 즉위 연도가 1년 정도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만, 지금으로부터 거의 3000년 전 역사이기 때문에 1년 정도의 차이는 오차범위 안에 들어간다고 생각됩니다.

저희가 오늘 생각해보고자 하는 부분은 이들에 대한 역사적 정황은 아닙니다. 역사적 정황을 알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열왕기하 13장」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이 구성이 어떤 의미를 전하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열왕기하 13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3절은 우리가 「열왕기」에서 흔히 보던 구조인 ‘~가 왕이 되어’로 시작되어 ‘역대지략에 기록되었다’, ‘~가 왕이 되었다’로 끝나는 구조입니다. 1-9절은 ‘여호아하스’의 이야기이고, 10-13절은 ‘요아스’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한 부분은 ‘엘리사’ 이야기를 담고 있는 14-25절의 서사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집중해서 봐야 할 부분은 「열왕기하 13장 4-5절」입니다. ‘여호아하스’는 북왕국 왕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야훼)께 직접 간구하여 도움을 받은 왕입니다. 지난번에 살펴보았던 ‘여로보암 2세’는 하나님께서 그냥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전 왕들인 ‘여로보암 1세’, ‘아합’, ‘예후’는 예언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얻습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 구절이 후대에 첨가된 구절이나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첨가한 내용이 아니라 역사가 집단이 초기에 참고한 자료에 적혀 있던 내용이라고 봅니다. 북왕국 왕이 하나님께 간구하여 도우심을 얻었다는 부분도 특이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내용은 「열왕기하 13장 5절」에 나타난 ‘구원자’입니다.

만약 「열왕기하 13장」이 1-13절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이 구원자의 존재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열왕기하 13장 1-13절」 뒤에 14-21절이 빠지고 22-25절이 붙는다면 구원자는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은 ‘요아스’로 볼 수 있습니다. ‘요아스’ 시절에 아람과의 전쟁이 그쳤고 ‘요아스’는 아람에게 빼앗긴 성읍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역사적 상황에서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따져보자면, 구원자는 아시리아의 ‘아다드 니라리 3세’가 됩니다. 이는 ‘이사야’가 바벨론 포로기를 끝맺어준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나의 종(사42:1)’, ‘하나님의 목자(사44:28)’, ‘기름부음 받은 자(사45:1)’으로 표현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때로 일부 학자는 구원자를 하맛 왕 ‘자쿠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자쿠르 석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과도한 추측으로 보입니다. 자쿠르 석비에 나타난 ‘자쿠르’의 승리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지도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열왕기」는 이 사이에 ‘엘리사’ 전승을 붙여놓음으로써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이야기합니다. 「열왕기」의 독자들은 사이에 들어와 있는 ‘엘리사’ 이야기로 인해 하나님께서 ‘여호아하스’에게 보내신 구원자는 ‘엘리사’라고 생각하며 읽게 됩니다. 이는 사사기와 유사한 흐름을 보여줍니다. 이런 흐름은 분명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의도한 결과입니다.

앵커 바이블 주석 『Ⅱ Kings』에서 ‘코간’은 1-13절은 본래 자료에서 나온 내용이고, 14-21절은 엘리사 전승, 22-25절은 열왕기 역사가 집단의 각주라고 말합니다. 22-25절을 각주로 본다는 뜻은 1-13절의 내용과 맞지 않는 14-21절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22-25절을 첨가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22-25절이 본래 10-13절 사이, ‘요아스’의 치적에 관한 기록이었는데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뒤로 빼놓은 것일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그 의도는 14-21절에 나타난 ‘엘리사’를 북왕국의 구원자로 읽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봅니다.

보통 학자들은 「열왕기하 13장 14-21절, 25절」에 나타난 북왕국 ‘요아스’가 아람 왕 ‘벤하닷’과 세 차례의 전쟁을 치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북왕국과 아람의 전쟁은 ‘예후’와 ‘여호아하스’ 시대에만 있었다고 봅니다. 이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아합’ 시대로 돌려진 아람과의 전쟁을 모두 따져봤을 때, ‘요아스’ 시절에는 전쟁이 없었다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약간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구원자를 ‘엘리사’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아람에게 승리를 거둔 왕을 굳이 ‘요아스’로 설정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실제 역사적 정황상 그 승리를 ‘여호아하스’에게 돌렸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열왕기」는 북왕국 역사를 독특한 방식으로 해설합니다. ‘엘리사’의 죽음은 북왕국의 몰락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 북왕국 ‘요아스’와 ‘여로보암 2세’는 몰락이 아니라 번영의 길을 걷습니다. 북왕국의 완전한 몰락, 아시리아에 의한 멸망을 알고 있는 열왕기 역사가 집단은 예후 왕조가 반짝였던 순간, ‘요아스’와 ‘여로보암 2세’의 통치 아래 이룬 번영은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열왕기하 13장 14-21절」에 나타난 엘리사의 죽음과 ‘요아스’에게 내려진 신탁은 아람 세력을 몰아낸 것이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절, 「열왕기하 13장 20-21절」에 나타난 엘리사의 묘실에 시체를 던지자 살아났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몰락할 이스라엘이 다시 살아나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다시 살아났다 해도 인간이기에 결국 또 다른 죽음의 순간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북왕국은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지난 글에서 살펴보았던, 「열왕기하 14장 26-27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북왕국의 번영은 오직 하나님께서 죽어버린 북왕국을 살리신 결과이고, 북왕국을 불쌍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잠시 구원하셨을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지난 글에서는 역사가와 예언자의 관점 차이를 다뤘기 때문에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조금 나쁜 이미지로 보이긴 했지만, 「열왕기」가 ‘여로보암 2세’ 시절을 북왕국 모두가 구원받은 시기라고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난 글에서 지적했던,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외면했다는 사실에서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열왕기하 13장」은 아람의 침공이 끝나고 북왕국의 번영이 시작되는 시점에 ‘엘리사’의 죽음 이야기를 첨가함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합니다. 북왕국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열왕기하 14장」으로도 이어져 ‘솔로몬’ 왕국의 북쪽 경계를 되찾는 영광의 시기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사라진 이후 북왕국은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열왕기」는 말합니다.

추가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여기에서 우리는 ‘엘리사’에 관한 전승이 열왕기 역사가 집단에 의해 약간은 각색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 전승의 본래 형태를 찾는 일은 이 글의 관심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배경과 이를 기록한 「열왕기」의 역사 해석이 관심사이기 때문에 ‘엘리사’ 전승의 본 형태 재구성 같은 작업은 진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북왕국 ‘예후’까지 다룬 후에 ‘엘리사’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려고 합니다. 누군가 ‘엘리사 행전’이라고 부를 정도로 「열왕기」 안에는 ‘엘리사’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납니다.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단순히 뛰어난 예언자를 말하기 위해서 ‘엘리사’ 전승을 사용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열왕기」가 ‘엘리사’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는 한 번쯤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남왕국 ‘요아스’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남왕국 여왕 ‘아달랴’에 관해서는 함께 다루지 않을 예정입니다. ‘아달랴’는 아합 왕조를 다룰 때 함께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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