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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우주와 부활우주성서에 예시된 두 유형의 시공우주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1.03.30 17:15

아담은 영생과 사망의 선택 길에 놓여있던 성서의 첫 사람

성서에 출현하는 최초의 인간은 아담이다. 하나님을 인식한 최초의 구도자인 아담은 영생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탄생한다. 성서를 읽는 독자들이라면 한 번쯤은 하나님이 말한 것처럼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열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동산의 여러 나무 열매 가운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지 않았다면 어떤 세계가 전개되었겠느냐는 질문을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물음은 성서에 기록된 인간은 장수와 요절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모두 죽는다는 이야기에 묻혀버리는 경향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제도종교의 종교문화는 ‘인간이 죽는다’는 대전제가 은연 중에 내포된 죽음 문화의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은 죽지 않는다’는 죽음 담론에 대한 저항이 담긴 영생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야훼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동산의 여러 나무 열매와 생명나무 열매’만 먹었으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은 죄로 ‘반드시 죽으리라’는 벌이 없는 성서적 세계가 전개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성서는 인간이 죽지 않는 세계의 구도 이야기와 영생에 대한 풍성한 이야기로 편집되었을 것이다.

변찬린은 성서해석의 역사에서 ‘사망론과 영생론’ 그리고 ‘사망론과 부활론’에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한다”는 원칙 하에서 철저하게 연구한 성과는 그리 흔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생사가 오가는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죽음과 정면 대결하며 후세에 ‘『성경의 원리』 사부작’ 혹은 ‘한밝성경해석학’이라고 불리는 첫 성과인 1979년 『성경의 원리』 머리말의 끝부분(미주 1)을 이렇게 장식하고 있다.

1. 성경 속에 뻗어 내린 대도(大道)의 정맥(正脈)은 선맥(僊,仙)脈)이었다.
2. 성경은 선(僊)을 은장(隱藏)한 문서이다.
3. 에녹과 멜기세덱과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로 이어지는 도맥은 이 날까지 미개발의 황금광맥이었다.
4. 산자의 영맥(靈脈)인 선(僊)은 동방(東方)의 지혜가 아니면 해독할 수 없는 비의(秘義)이다.
5. 『성경의 원리』상·중·하 삼권은 선맥(僊脈)을 따라 난삽(難澁)한 성경의 암호를 해독하였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11.

변찬린에 의해 선맥(僊脈)과 선맥(仙脈)은 동서의 영생관을 포용하는 개념으로 ‘살아서 승천하는 선맥(僊脈)과 죽었다가 살아나 승천하는 선맥(仙脈)’으로 개념화되어 재탄생한다. 선맥(僊脈)우주에서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바로 영생으로 수렴되지만, 선맥(仙脈)우주에서 생사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부활을 통해 영생한다. 필자는 변찬린의 언어맥락을 존중하여 성서적 세계에서 전자를 ‘변화우주’라 하고, 후자를 ‘부활우주’라고 부르기로 한다.

변화우주는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 때 전개되는 시공이며, 부활우주는 아담이 타락한 후 전개되는 시공이다. 그러나 변화우주이든 부활우주이든 성서적 세계관은 ‘생과 사’, ‘몸과 마음’ 혹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이원론적인 피안세계관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고, ‘시체와 무덤이 없는’ 생사를 초극한 ‘영생’을 지향한다는 초지일관하는 해석학적 태도를 견지한다.

본래 인간이 생(生)한 목적이 상대적인 사를 향해 걸어가기 위함이 아니었다. 육신적인 생이 영적인 생으로 변화받기 위하여 인간은 창조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인간은 상대 차별의 거짓 지혜와 망념 때문에 생과 사의 상대적인 윤회 바퀴 속에서 신음하는 존재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던들 생사의 윤회 바퀴에 굴러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태어남은 죽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고 보다 높은 생으로 도약하여 영생하기 위하여 태어났던 것이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500.

성서에서 원시인의 죽음과 하나님을 인식한 아담의 죽음은 명확하게 구별된다. 아담의 역사적 실재성, 선악과의 정체 등에 대해 변찬린은 성서 안에서 대답을 한다. 논지에 집중하면 아담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선악과를 먹은 후에 성서가 무덤 세계로 전개된 저간의 사정을 변찬린은 이렇게 말한다.

아담 이래 죄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의 존재로 전락하였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창3:17) 하였다. 죽음이란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이며 만약 생명과를 따먹었다면 아담 이래 인류에게는 죽음이 없고 무덤이 없었을 것이다. 죽음은 아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담 이전에는 죽음이란 없었다. 생물학적 의미의 생멸은 원시인에게 있어서도 성경적 의미의 죽음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다(「타락론」 및 「부활론」 참조). 성경적 의미의 죽음은 죄와 깊은 관계가 있다. 아담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존재로 전락하였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65.

산 자로서 죽은 아담과 죽은 자로서 죽은(어가는) 인간의 생사관과 피안신앙은 큰 차이가 있다. 성서에서 산 자로서 죽은 아담과 죽을 운명으로 태어나 죽어가는 성서적 인간의 ‘죽음’에 대해 변찬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본래 아담은 생령으로 산 자였다. 산 영인 아담이 죽은 자가 된 것이 타락이다. 참다운 의미의 죽음은 아담만이 경험했을 뿐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생령으로 태어나지 않고 이미 죽은 자가 되어 태어났으므로 참다운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중략)

*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롬 5:12–14.

이 성구를 보아도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는 죽은 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담이 경험한 죽음과 현재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죽음은 본질적으로 그 차원이 다른 죽음이다.
아담은 산 자로서 죽었고 우리는 죽은 자로서 지금 죽어가고 있는 존재이다. 이 죽은 자로서의 죽음이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현상인데 이를 하나님이 창조한 본래적인 생명현상으로 착각하여 영혼이 천당간다는 무지와 미망의 피안 의식과 내세관을 조작해 냈던 것이다.
아담이 생령 곧 산자가 되었을 때 즉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영혼과 육신의 모순과 분열과 이율배반을 경험하지 않았던 존재였다. 그는 산자로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기 위하여 구도하고 있던 최초의 구도자였다. 산 자만이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영생할 수 있지 죽은 자는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을 수 없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죽었다. 산 영이 곧 죽은 영이 되었다. 영혼과 육신이 싸우는 모순과 분열과 이율배반을 경험하게 된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479-480.

아담의 죄로 인해 시작된 죽음의 성서세계는 그리스도교의 피안감성과 피안의식을 지배하며 직업종교인은 영혼을 하늘나라(?)로 보내는 구원의례를 창안해 내었다. 과연 인간의 영혼은 어느 하늘에 가는 것일까?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있는 하늘인가? 다른 하늘일까? 다른 하늘이라면 어떤 하늘일까? 이에 대해 성서는 그다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성서에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승천하는 에녹과 엘리야, 죽음을 경험한 후 부활하는 모세와 예수가 있다. 만일 성서적 인간이 죽는 것이 성서의 진리라면 이런 예외적인 승천전승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성서는 에녹과 엘리야의 변화를 통한 승천, 그리고 모세와 예수는 부활을 통한 승천을 하는 생명관을 새로운 생명현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에녹과 엘리야의 선맥(僊脈)인 변화우주

성서적 인간으로 죽지 않고 승천한 사례는 두 명이 있다. 에녹과 엘리야이다. 여기서 말하는 에녹은 가인 계에 속한 에녹이 아니고 아담 계통의 칠대 손을 말한다. 창세기 5장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서 세상에 있지 않았다고 하며, 히브리서에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고 말한다. 성서주석도 에녹이 불멸(immortality)의 존재로 이해한다.(2)

*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5:24,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히 11:5

이 간단한 두 성구는 성경 속에 나타난 여러 가지 신비한 사건 중에서도 가장 신비한 사건에 속하고 있다. 에녹이 죽지 않고 선화한 도비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가 죽지 않고 영생의 차원으로 고양되고 비상하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몸은 무덤 속에서 썩어 두더지와 구더기의 밥이 되지 않고 영원 속에 해체되어 승천하였다.
아담 타락 이후 셋계의 구도자들은 영생의 통로를 대각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거듭하였고 드디어 에녹에 이르러 영차원(靈次元) 성공간(聖空間)에 이르는 비의(秘義)의 문이 대각되었던 것이다. 무변한 우주 속에 섬광처럼 번득인 영생에의 통로!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中』, 한국신학연구소, 2019, 67.

개신교 독자들은 변찬린의 에녹 승천이 낯설게 들릴지 모르지만, 에녹은 외경에 계시적 문서의 『에녹서』가 있을 정도로 승천한 존재라는 것은 유대인에게 전혀 생경하지 않다.(미주 3) 인간은 생사를 초월한 영생의 존재로서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지 죽은 다음에 영혼이 ‘산 자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동행’의 의미에 대해 ‘믿음’과 ‘회개’ 등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더라도 에녹 승천 사건은 영혼만이 하늘나라에 간다는 생사관을 수용하지는 않는다. 만일 에녹의 승천이 성서의 진리라면 예수 탄생 이전에 승천한 에녹이라는 존재는 어떤 신학적 의미가 있는지 물어볼 줄 알아야 한다.

▲ 변화우주: 홍영숙, 바람의 노래, 2020.(4)

또 한 명은 엘리야이다. 엘리야는 B.C. 9세기경 북왕조 이스라엘의 전성기에 활동했던 위대한 예언자이다. 당시 아합과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 우상 숭배로 이스라엘의 민족정신이 부패하자 갈멜산 대결을 통해 종교개혁을 한 후 호렙산 굴속에서 하나님과 해후한 후 영생의 비밀을 깨닫는다. 변찬린은 엘리야가 “죽지 않는 산 자의 도비인 선맥(僊脈)을 대각”하고 시체를 남기지 않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한다고 말한다.

개역개정 왕하 2:11: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KJV 2 Kings 2:11 And it came to pass, as they still went on, and talked, that, behold, there appeared a chariot of fire, and horses of fire, and parted them both asunder; and Elijah went up by a whirlwind into heaven.

NAS 2 Kings 2:11 Then it came about as they were going along and talking, that behold, there appeared a chariot of fire and horses of fire which separated the two of them. And Elijah went up by a whirlwind to heaven.

BGT 2 Kings 2:11 καὶ ἐγένετο αὐτῶν πορευομένων ἐπορεύοντο καὶ ἐλάλουν καὶ ἰδοὺ ἅρμα πυρὸς καὶ ἵπποι πυρὸς καὶ διέστειλαν ἀνὰ μέσον ἀμφοτέρων καὶ ἀνελήμφθη Ηλιου ἐν συσσεισμῷ ὡς εἰς τὸν οὐρανόν

중국어성경: 他們正走著說話、忽有火車火馬、將二人隔開、以利亞就乘旋風昇天去了。

성서에서 엘리야가 승천한 후 엘리사의 엘리야 승천 목격담을 믿지 않은 50명은 엘리야가 승천하다가 땅에 떨어졌다고 의심하며 사흘을 찾았지만 실패한다(왕하 2:16-18). 동아시아에서는 승천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면 유대인과 같이 의심을 한다는 기록보다는 오히려 선화(仙話)의 사실이 기이(?)하기는 하지만 긍정하는 태도로 기술되었다는 차별성이 보인다. 특히,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서 선화(僊化)는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으로 인식하는 바탕이 있다. 변찬린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성경의 산하에 뻗어 내린 구약의 맥(脈)을 다시 한 번 조감하라. 아담 이래 죽은 자들의 해골이 골짜기마다 뒹굴고 있지 않은가. 사행(蛇行)한 강물마다 타락한 혈대의 피가 굽이쳐 흐르고 사자들의 시신을 매장하는 자손들의 곡성이 서글프게 메아리치던 하늘가에 살아서 승천하는 엘리야의 경이로운 모습이야말로 구약의 지혜로는 풀 수 없는 신비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엘리야가 승천한 출구는 산자가 수렴되는 정상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타락된 인간이 이 통로를 잃어버린 다음 죽어서 영혼이 천당 간다는 사자(死者)의 종교관 - 피안의식이 생기게 된다. 하늘나라로 가는 잃어버린 통로 곧 선(僊)의 길을 다시 찾자.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中』, 한국신학연구소, 2019, 515.

구약의 두 인물인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 전승은 피안 신앙을 부정하는 성서적 사건이다. 변찬린은 에녹과 엘리야 사건을 통해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피안 신앙에 물든 이원론적 생사관을 초극한 본래의 영생차원을 성서가 제시하는 생명의 진리라고 말한다.

산 자의 맥이란 살아서 승천하는 선맥(僊(仙)脈)을 말한다. 이것이 본래의 도맥이며 죽지 않고 수렴(收斂)되는 산 자의 진면목인 것이다. (중략) 이 사건은 구약 속에 섬광처럼 번뜩인 경이이며, 최대의 신비이며, 최고의 비의(秘義)였다. 에녹과 엘리야가 죽지 않고 선화(僊化)한 도비(道秘)는 하나님이 인간을 수렴하는 본래적인 방법인데 인간은 타락하여 이 도맥을 상실한 채 죽으면 영혼이나 천당 간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67.

변찬린은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 전승을 개별 사건으로 인식하는 해석학적 전통을 뛰어넘어  성서에서 ‘아담이 타락한 후’ 전개된 ‘죽은 자의 맥과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 경우‘의 ‘산 자의 맥’을 ‘도맥(道脈)’이라는 성서의 생사관이라는 큰 흐름에서 포착하여 동방의 선맥과 이해지평에서 융합시킨 것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변찬린이 말한 “성경은 선(僊)을 은장(隱藏)한 문서이다”라는 선언적 명제는 학계에서 제대로 조명되어야 한다.

선맥(僊脈)은 인간이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변화하여 승천하는 변화우주의 영생관이다.

모세와 예수의 선맥(仙脈)인 부활우주

그렇다면 변화우주의 선맥(僊脈)이 아닌 부활우주의 선맥(仙脈)은 성서에서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가? 죄로 인해 타락한 성서적 인간에게 선맥(僊脈)은 보편적인 영생의 방법이 아니다. 선맥(仙脈)은 죄로 인해 죽어가는 인간에게 차선책으로 제시된 영생의 통로이다. 즉, 부활신앙이다. 성서에서 승천 전승은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전수되어 있듯이(미주 5) 고대 한국인의 신화 전승과 고구려 벽화를 포함한 유물과 유적지, 그리고 노장계열의 도가서 등 도교문화의 맥락과 근대화된 토착화의 신종교의 종교문헌에도 그 맥락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은 독자들이 반드시 기억하여야 한다.

구약성서에서 에녹과 엘리야는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은 변화의 생명 상징이라면, 모세는 죽은 후에 승천한 부활의 상징적 예표이다. 아브라함의 칠대 손인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킨 구약의 최대 선지자이다. 구약의 최대 선지자인 모세는 죽은 후에 승천한 인물이다. 모세의 승천은 에녹과 엘리야와는 다른 차원의 영생관이다. 에녹과 엘리야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산 자로서 승천하였다면, 모세와 예수는 죽음을 경험한 후 승천하였다. 에녹과 엘리야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고, 모세와 예수는 죽음을 경험하였다는 차별성이 있지만, 네 명의 인물은 모두 시체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모세가 빛의 체험(출 34:29, 40)을 하고 예수도 빛의 체험(마 17:2, 막 9:3, 눅 9:29)을 했다는 유사성이 있다.

▲ 부활우주: 홍영숙, 원형의 춤, 2016.(6)

변찬린은 구약의 모세가 예수의 부활의 모형이라고 한다. 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이 적힌 돌판을 들고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이 빛이 나고 종교체험의 현상과 유다서에서 천사장과 마귀가 모세의 시체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원인의 해석을 통해 모세가 부활한 성서적 근거를 제시한다. 다소 길더라도 그대로 인용해 보기로 한다.(미주 7)

이 에녹과 엘리야의 선화는 죽은 자들은 깨달을 수 없는 도맥이므로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부활의 도맥〉을 발굴하지 않을 수 없다. 모세가 그 표본인 것이다.

*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신34:5–6,
*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유1:9,

모세의 무덤과 시체에 대한 이 두 성구는 난해하고 기이한 암호이다. 모세의 무덤이 왜 없어졌으며 마귀와 미가엘이 왜 시체를 놓고 싸웠을까?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므로 죽은 자의 시체를 놓고 다툴 수 없다. 시체는 마귀의 소유로서 무덤 속에 인봉된다. 천사가 모세의 시체를 놓고 마귀와 다툰 것은 그 시체는 부활될 몸이었기 때문이다. 또 모세의 무덤이 없어진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은밀히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모세를 부활시킬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아무런 근거 없이 부활의 도를 제시하면 마귀의 참소를 받는다.

*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출 34 : 29 –33.

이 성구가 바로 모세를 부활시킬 수 있는 성경적 근거이다.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발광체의 경험은 모세가 선화(僊化)의 비의(秘義)를 체험한 것을 암시하고 있다. 모세의 이 경험은 변화산에서 광채가 난 예수의 도맥과 연결된다. 모세는 예수의 구약적 표상이었다. 그러므로 시내산에서 발광체가 된 모세의 체험은 장차 부활할 예수의 모형이다. 예수도 무덤에 매장되기 전에 변화산에서 발광체가 되었다. (중략) 모세가 발광체의 경험 곧 선화될 도비를 깨달은 존재이므로 하나님은 그를 은밀히 부활시켰다. 또 모세는 장차 부활의 도를 선언할 예수의 구약적인 모형이므로 그 시체가 마귀의 소유물이 되어 무덤 속에 영원히 인봉될 수 없다.
그러나 부활의 주인인 예수가 부활의 도를 열기까지 종의 마당인 구약에서는 모세의 부활은 개봉할 수 없는 도비였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런 도비를 몰랐던 까닭으로 왜 모세의 무덤이 없어졌고 왜 천사가 마귀와 시체 문제로 싸웠는가를 깨달을 수 없었다. 이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도들도 아직 그 암호를 해독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67-69.

뿐만 아니라 변화산에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여 예수의 예루살렘의 죽음에 대해 논의한다.  많은 구약의 선지자 중에 하필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신학적 견해가 있다. 변찬린은 “성서는 선맥(僊/仙脈)이다”는 성서해석의 맥락을 견지하며 엘리야는 살아서 승천하는 선맥(僊脈)의 주인공으로, 모세는 죽었다 살아나 승천하는 선맥(仙脈)의 유형으로  예수의 죽음의 형태에 대해 논의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소 길지만 중요하므로 변찬린의 기술을 보기로 하자.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변화산의 암호를 바르게 해독하지 못하였다. 구약에는 기라성(綺羅星)같은 선지자들이 많은데 왜 변화산에서 예수 앞에 모세와 엘리야만 나타났을까?

*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눅 9:30-32, 마 17:1-8, 막 9:2–8,

이 성구를 보면 영광 중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의 별세에 대하여 말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세 분이 의논한 사실! 여기에는 참으로 심오한 비의가 있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이유는 다른 구약의 선지자들은 죽어서 땅속에 묻혀 썩음을 당 했지만 모세와 엘리야는 승천하고 부활한 존재였기 때문에 예수 앞에 나타날 수 있었다.
산 자의 도에는 두 가지 모형이 있다. 엘리야적 승천과 모세적 부활이다.
죽지 않고 승천하는 엘리야적 선맥과 죽었다 시해선(屍解仙)하는 모세적 선맥이 있다.
본래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땅 위에서 장생불사하다가 하늘나라로 수렴될 때 죽지 않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받아 선화(僊化)되는 길이 있었는데 타락으로 죽음의 존재로 전락된 까닭으로 죽었다 부활하는 혈로(血路)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부활이란 비본래적인 제 이의적(第二義的)인 길이다.
예수는 변화산에서 용모가 변하고 옷에 광채가 나서 발광체의 체험을 했다. 인간은 선화되면 영광스러운 몸으로 빛나는 것이다.
예수는 변화산에서 엘리야적인 승천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적 선맥은 죽은 인간과는 관계없는 길이었다. 죽은 인간과 연결 지어 주기 위하여는 죽었다 살아나는 모세적 시해선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은 섬광처럼 보여준 모형일 뿐 인류 보편의 길이 아니었다.
그 누가 죽은 자리에서 에녹과 엘리야의 길을 대각하여 승천할 수 있겠는가?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은 특수한 모형일 뿐 죽은 인간들을 살리는 보편적인 길은 부활의 길이었다.
예수는 엘리야적 선화와 모세적 부활의 두 길 중 모세가 모형으로 보여준 부활의 길을 선택했다. 죽었다 부활하는 길만이 죽은 인간의 후예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요 보편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예수는 변화산에서 골고다를 조망했던 것이다.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은 죽은 자 하고는 연결될 수 없는 비의의 도맥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에녹과 엘리야를 통하여 승천의 도맥을 섬광(閃光)처럼 보여준 뜻은 그 길이 본래적인 길이었음을 모형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죽은 자들에게는 부활의 길만이 참 길이 되었다.
예수는 산 자로서 죽었고 죽은 자로서 다시 산 자가 되어 인류 구원의 대도(大道)를 개명(開明)했던 것이다.(롬 14:9, 행 10:42, 계 1:17-18)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69-71.

변찬린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을 때 전개되는 변화우주와 인간이 타락한 후 전개된 부활우주를 막론하고 성서적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방법은 ‘산 자’만이 만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부활우주에 만연된 영혼불멸에 근거한 생사관과 삶은 죽음의 연습이라는 철학적 담론, 기계인간으로 대변되는 과학적 유토피아의 영생관 등은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의 궁극적 가치를 포기한 피안담론에 불과하다. 만일 죄로 인해 죽은 인간을 살린다는 부활 신앙이 없다면 성서는 공허하다. “부활의 진리는 성경의 씨(核)이다”라고 변찬린은 거듭 강조한다. 또한 산 자로서 승천하는 본래 인간의 가치는 타락한 후 죄로 인해 부활신앙조차 바르게 이해되지 못하고, 또 다른 이원적인 생사관을 바탕으로 하는 피안 신앙에 귀결된다는 사실은 주의하여야 한다. 부활우주에서 죽어가는 인간이 죽은 인간을 보면서 축적되는 피안적 의식관성은 그만큼 강렬하다. 영혼불멸은 잘못된 피안관이다. 산 자는 “풍류체”이자 “발광체”이고 “변화체”이자 “부활체”이다. 변찬린은 이렇게 말한다.

죽음에서의 자유와 해방의 선언! 이것이 복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도는 타락과 죽음으로 생긴 비본래적, 제2의적(第二義的) 도맥이다.
본래적이며 제1의적인(第一義的) 도맥은 선맥(僊脈)이며 평화의 도맥이다.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추수하는데 두 가지 도맥이 생겼다.

ㄱ.  산   자 ― 변화 ― 영으로 수렴
ㄴ.  죽은 자 ― 부활 ― 영으로 수렴

변화의 길은 하나님께 이르는 바르고 곧은 길이지만 부활의 길은 돌고 굽은 길인 것이다. 변화로 선화하든 부활로 승천하든 결과적으로는 산 자만이 하나님과 해후할 수 있는 것이다. 죽어서 영혼이 천당 간다는 망념을 깨뜨리고 산 자의 도맥을 대각(大覺)하자. 예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재림하실 때 산 자는 홀연히 발광체로 변화하고 죽은 자는 부활할 것이다. (빌 3:21, 골 3:4, 고전 15:51-52)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70-71.

변화우주와 부활우주는 한국의 선맥에 의해 재조명되어야 한다

지금쯤 독자는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뒤따를 것이다. 성서의 역사에서 부활우주의 제사장이 예수그리스도라면, 변화우주의 제사장은 누구일까? 만일 있다고 한다면 변화우주의 제사장과 부활우주의 제사장은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을까? 그리고 현존하는 인간이 ‘죽은 자의 맥’에서 어떻게 ‘산 자의 맥’락과 연결되며,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언약의 씨’와는 어떠한 상징적 관계를 가지는 것일까? 등의 심대한 과제에 대해서는 적당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재론하기로 한다.(8)

영원한 우주역사와 유한한 지구역사에서 코로나 판데믹 시대는 축 시대의 관성적 사유에 대해 반성적 회고와 새 축 시대의 미래 전망을 성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동이족의 선맥(僊/仙脈)과 중국의 도교문화, 그리고 성서를 포함한 세계 경전을 이해지평에서 융합한 ’영생담론‘이 포스트 코로나 판데믹 시대를 앞두고 활발한 담론을 형성하여야 한다. 한국이라는 종교적 지평의 중요성을 자각한 한국의 지성이라면 이런 세계적 담론의 주체로 나서야 할 때이다. 한국의 자각한 지성은 이런 담론을 감내할 수 있는 충분한 학문적 역량이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미주

(미주 1) 숫자는 필자가 강조를 위하여 적은 것임.
(미주 2) 크리에그 R. 쾨스터, 우성훈 옮김, 『앵커 바이블 히브리서』, CLC, 2018, 817.
(미주 3) 이병학은 에녹을 승천한 자로서 유대적 메시아 구조론에서 예수의 기독론과의 관계성을 서술하고 있다. 이병학, 「유대 묵시문학과 신약성서 에녹과 예수」,  『신학논단』 19(2), 353-394.
(미주 4) 홍영숙, 바람의 노래(A Song of Wind), 96 x 96cm, Oil & Egg Tempera on Canvas, 2020.
(미주 5) 배정훈, 「승천전승(Heavenly Ascent)의 기원과 발전」, 『장신논단』 24, 2005. 55-77.
(미주 6) 홍영숙, 원형의 춤(Circular Dance), 40 x 30cm, EggTempera on Paper, 2016.
(미주 7) 이에 대해 상세한 내용은 『성경의 원리 上』의 제 2장 「도맥론」과 제 6장 「예수론」,  『성경의 원리 中』, 제6장 「40년 광야의 사건들」 중 제 3절 무덤이 없는 모세를 참조할 것.
(미주 8) 관심 있는 이는 『성경의 원리』사부작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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