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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하도다!” - 惚兮恍兮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21
이병일 | 승인 2018.05.28 23:28
“공덕(孔德)의 태도는 이 도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물(物)이 되는 그 도는 마땅히 황홀하다. 홀황하도다! 그 속에 상(象)이 있다. 황홀하도다! 그 속에 물(物)이 있다. 고요하고 아득하도다! 그 속에 정(精)이 있다. 그 정(精)은 심히 참되다. 그 속에 신(信)이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이 다함이 없다. 이로써 사람들은 비로소 분간한다. 나는 어찌하여 사람들이 비로소 그 상태가 된 것(사람들의 시작이 그러함)을 아는가? 바로 이것으로써 알 수 있다.”
- 노자, 『도덕경』, 21장
孔德之容, 唯道是從. 道之爲物, 惟恍惟惚.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窈兮冥兮, 其中有精. 其精甚眞, 其中有信.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吾何以知衆甫之狀(衆父之然)哉. 以此

공덕(孔德)은 비움의 큰 덕, 구멍처럼 속이 빈 어둡고 큰 덕입니다. 앞 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배움이 없으면 구멍 속 같이 캄캄하여 귀천미악(貴賤美惡)을 판단하는 앎이 없습니다. 이렇게 규범적 지식이 없는 무지(無知)가 자연을 관찰하는 공덕의 태도라고 노자는 말합니다.

배움이 없는 공덕의 태도를 지킬 때 도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예와 법에 대한 지식을 배울수록 자연적 조건을 천하게 여겨 도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길과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21장에서는 16장의 논의를 좀 더 진전시켜 만물이 따르는 명(命)의 자연적 근거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Getty Image

상(象, 생장력)과 물(物, 물질력)은 오로지 시비이해의 판단의식이 없을 때 경험될 수 있습니다. 상과 물에 의해 만물이 이루어졌지만, 이렇게 형성된 만물 속에는 각자 고유한 한계를 지키는 생리적 힘이 있으니 노자는 이것을 정(精)이라고 합니다. 생명은 다양하며, 각각 고유한 욕구와 질서를 갖추고 있습니다. 정(精)은 자신의 고유한 한계와 수명을 요구하는 생명의 뿌리입니다. 살아 있는 생물은 생명의 요구를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물의 생명력은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지만, 동시에 생멸의 힘을 동시에 갖추고 있습니다.

노자는 이 정의 활동을 심히 참되고 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경험은 의도를 버린 공덕의 태도로 만물의 활동을 관찰한 결과입니다. 만물이 질서를 갖추는 것은 상(象), 물(物), 순환의 명(命), 정(精) 등의 도의 작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연의 도를 이해하고 깨닫는 일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황홀하고 홀황하다고 하거나 그윽하고 아득하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쓰이는 한자 황(恍)은 “황홀하다, 멍하다, 어슴푸레하다, 마음을 빼앗겨 멍한 모양, 형체가 없는 모양, 어슴푸레한 모양”이라는 뜻이고, 홀(惚)은 “황홀하다, 흐릿하다,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 모양, 마음을 빼앗겨 멍한 모양”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요(窈)는 “조용하고 잠잠하다, 그윽하다, 어둡다, 희미하다, 누긋하다”라는 뜻이고, 명(冥)은 “어둡다, 그윽하다, 아득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삶과 자연을 잠시 머물러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모든 사람들은 이 도를 알 수 있습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가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윤동주의 “새로운 길”

황홀하고(恍兮惚兮) 요명하다고(窈兮冥兮) 하는 도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 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생명의 움직임을 애써 외면하는 이유는 자기의 삶의 주체를 다른 무엇인가에 넘겨주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니라 남에게 종속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일상을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성공, 돈, 명예, 이익 등)에 빼앗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맞이하는 나의 삶과 일상에서도 우리는 궁극적인 도의 움직임이나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주체로 세워서 삶을 관찰하고 헤아린다면 도의 세계,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알면 행동할 수 있고, 행동하면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어슴푸레하고 흐릿하다고(황홀), 그윽하고 아득하다고(요명) 외면하지 말고 자기의 삶을 돌아보며 헤아리면, 하느님 나라의 비밀은 나의 삶 속에서 드러나고, 하나님의 나의 열매는 나의 행동으로 맺게 될 것입니다.

“등불을 가져다가 등경 위에 두어서 빛이 드러나고 주위가 밝아지는 것처럼, 이제 예수님의 행동과 가르침과 선포로 감추어 졌던 하느님 나라의 비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잘 생각하고 깨달아라. 그 말씀을 귀 기울여서 듣고, 곱씹어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씨름해 보라. 그렇게 깊이 생각하고 진지하게 고뇌할수록 하느님 나라의 비밀은 드러나고 깨달음으로 열매 맺게 될 것이다. 그리고 깨달은 만큼 행동하고 씨앗을 잘 키운다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숨겨진 것이라도 때가 되면 드러나게 마련이고, 감추어졌을지라도 때가 되면 알려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와 비유 속에 담긴 비밀도 드러나고 알려지게 됩니다. 땅 속에 있어서 보이지 않던 씨앗도 때가 되면 싹이 나고 자라면서 볼 수 있게 되듯이 하느님 나라의 비밀(복음)도 때가 되면 드러나고 알려질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우리의 활동을 통해서 무엇이 드러나고 알려지고 있나요. 우리가 간직한 하느님 나라의 비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어떻게 싹이 트고 어떤 모습으로 자라고 있나요. 우리가 맺은 열매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나에게, 우리에게 뿌려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언제 드러나고 알려질까요?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그것을 보고 들으면 됩니다. 나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고 들을 수 있으면 더 깊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비밀이 담긴 수많은 사건을 보고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지른 사람입니다. 우리 속에 들어온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의 씨앗입니다. 삶의 매 순간마다 헤아리고, 생각하고, 되새기고, 고민하면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자연스럽게 몸의 움직임으로 표현될 때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서 많이 곱씹고 움직일수록 더 많은 깨달음을 얻고, 하느님 나라의 모습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드러나고 알려지리라!”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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